어떤 순간은 완전히 상실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사람들은 그 점을 알면서도 잃어버린 삶의 지점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추억한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관통하는 주제다. 이 책은 국적과 시공간이 제각각인 아홉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지만, 상황과 인물을 거대한 상실감이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외국 여성은 세상을 떠난 연인의 나라 한국에서 상실감을 극복하려 하고, 물고문을 하다가 한 대학생을 죽게 만든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전직 대공과 형사는 그 학생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날것의 고통을 갈망했던 <기억할 만한 지나침>의 고3 여학생은 자신이 안락함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지금 막 무엇을 잃어버리려는 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상실보다 중요한 건 상실 그 이후의 삶이다. ‘지금, 여기’에 남은 사람들은 가슴에 묻거나 책임을 지거나, 혹은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식으로 잃어버린 날들을 극복하려 한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삶의 비참한 진상을 다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야만 한다고 믿는 이의 성숙한 낙관”을 느낄 수 있다고 할까. 그동안 ‘나의 친구 그의 영화’ 지면의 발랄한 영화 이야기에 빠져 잠시 잊고 있었던 듯하다. 김연수는 본래 진중한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