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두가 평생의 사랑을 첫눈에 알아보는 건 아니다. 그 첫밤은 종말의 기운이 감돌았던 90년대 중반이었다. 갓 산 피아노 CD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인간의 목소리 같기도 한. 창문을 닫았다. 다시 CD를 재생했다. 소리는 가시지 않았다. 다른 방에서 TV를 틀고 있나 확인했다. 모두 꺼져 있다. 수수께끼 같은 그 소리는 가시지 않았다. 디스크 오류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다른 CD를 틀었다. 우습게도 그게 이후 10년간 이어진 클래식과의 단절의 시작이었고, 그 음반이 무엇이고 연주자가 누구였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유명한 글렌 굴드의 허밍 소리와 무식하고 우스꽝스러운 첫 조우를 하긴 했지만,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미치게 된 진짜 계기는 로잘린 투렉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무심코 CD를 틀어놓았는데, 곡이 너무 아름다워서 책을 덮고 음반이 끝날 때까지 꼼짝도 않았다. 눈앞에 우주가 펼쳐지는데 책이 무슨 상관이랴. 내가 생각했던 바흐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 곡은 아주 이상한 곡이었다. 쌍둥이처럼 닮은 부부가 낳은 서른쌍둥이를 보는 듯했으니까. 모두 닮았지만 같지 않고, 당연하게도 시작이 없어서 끝도 없다. 갑자기 첫곡과 같은 곡이 다시 연주된 뒤 음반이 끝났을 때의 황망함이라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원래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의 후원자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다(제목에 골드베르크가 들어가게 된 구구절절한 과정은 생략한다). 모두 32곡으로 구성되는데, 주제(아리아)를 제시한 뒤 30개의 변주를 제시하고 마지막에 다시 주제를 등장시키는 구성이다. 서른곡의 변주는 세곡씩 작은 묶음으로 나뉘고, 그 세곡은 자유로운 변주, 기술적인 변주, 카논으로 나뉜다. 3, 6, 9, 12…로 이어지는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첫 카논보다 1도씩 음정을 증가시키게 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의 주제를 서른 가지로 변주하면서 그 서른 가지가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체계 안에 자리잡게 했다는 말이다. 서른쌍둥이. 이런 걸 불면증 치료용으로 작곡하다니, 미칠 노릇 아닌가 말이다. 가끔 잠이 안올 때 밤에 틀어놓기도 하는데, 32곡 연주가 끝나면 정신이 더 말짱해진다. 아리아드네의 실을 잡고 미로를 헤매는데 580일이 지나도록 미로 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행복함에 젖어.
로잘린 투렉으로 시작해 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양한 연주자의 녹음으로 샀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 다르다. 연주자들이 악보를 그대로 연주하는 것도 아니다! 열여섯살 때 바흐 평균율 1권의 프렐류드와 푸가 A단조를 연습하다 갑자기 정신을 잃었던 경험 이후(접신이랄까 접바흐?) 평생을 독신으로, 바흐스페셜리스트로 살았던 투렉의 정갈한 진지함을 접할 때면 목욕 재개까지는 아니어도 손이라도 씻고 앉아 있어야 할 듯한 기분이 든다. 꾸밈음을 거의 무시한 빌헬름 켐프의 연주는 담백하고 대담하다. 안드라시 시프는 켐프와는 또 다른 방식의 수수함을 보여주는데, 재킷도 마침 멋져서(ECM에서 나왔다) 선물용으로 그만이다. 이 연주는 취향을 거의 타지 않는다. 시끄러운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할 땐 고음악 전문가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의 쳄발로 연주로 이 곡을 듣는다. 레온하르트 선생님, 죄송해요. 에프게니 코롤리오프는 투렉, 굴드와는 또 다른 무결점의 진수를 들려준다.
그래서, 다시 굴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십 몇년 만에. 연주를 하면서 허밍을 해 녹음기술자들을 당혹시켰던 그의 55년판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그는 죽기 1년 전인 81년에 다시 이 변주곡을 녹음했고 그 또한 명반이다). 그는 피아노 선생들이 대경실색할 구부정한 자세로, 마치 록스타 같은 기세로 바흐를 표현했다. 파고들듯 덤벼들듯 연주하는데도 마치 깃털처럼 건반에 올라붙는 손가락들. 마치 작곡하듯이 친다, 굴드는. 환장하도록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