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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점프 컷] 무심한 앵글이 낳은 혁신

시네마디지털서울 2009 수상작 <옥스하이드2>가 흥미로운 이유

<옥스하이드2>

다들 디지털영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하는데 솔직히 개인적으로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보수적인 칸영화제에서조차 디지털영화를 경쟁부문에서 트는 걸 보면 이 매체가 작가주의 영화의 복음이 될 가능성은 예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주류에서 어떻게 디지털 매체를 활용할 것인지도 관심거리다. 어느 쪽으로나 만드는 입장에서 과거보다 진입 장벽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다. 누구나 영화를 찍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게 내가 좋아했던 20세기의 영화와 비슷한 레일을 탈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뒤통수나 손발뿐 아니라 솥을 찍는 카메라

지난 8월19일부터 25일까지 열린 ‘시네마디지털서울 2009’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정리해볼 기회를 가졌다. 내가 속한 심사위원단인, 국내외 비평가들이 주는 블루 카멜레온상은 리우지아인 감독의 <옥스하이드2>에 주어졌다. 이 영화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장성한 딸(리우지아인 감독 자신이다)이 모여서 저녁식사를 위해 만두를 빚고 삶고 먹는 게 내용의 전부다. 영화가 처음 시작하면 30분 가까이 화면이 지속된다. 가방을 만드는 아버지가 가죽을 다듬다가 장을 보고 온 어머니가 저녁거리를 책상에 놓고 책상 위치를 바꿔놓은 채 만두를 먹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 이후 영화는 9개의 화면으로 이어진다. 카메라는 한번 자리잡으면 20분, 30분가량 고정돼 있고 상황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위치를 바꾼다. 압권은 영화 후반부에 아버지가 만두를 삶으려고 솥을 바닥의 가스불에 올려놓을 때인데 카메라는 바닥으로 앵글을 옮겨 식탁 밑의 솥을 찍는다. 이런 앵글은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딸이 식탁 밑에 쭈그려 앉아 만두를 삶는 법에 대해 설왕설래하고 다시 식탁 위로 몸을 일으켜 대화를 할 때는 카메라가 그들의 발만 포착하고 있다.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세계, 밥 먹는 동안 오가는 사소한 대화와 일상적인 동작들을 포착한 <옥스하이드2>의 혁신은 인물의 감정선에 따라 숏을 나누지도, 구성하지도 않고 인물이나 기타 화면 내의 사물들의 관계에도 무심한 앵글로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렇게 구성된 화면에서 이 영화만의 독자적인 미학이 생성되기는 한다. 아마도 치밀하게 리허설을 치렀을 이들 가족은 기록영화 속의 대상처럼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하고 있다. 아버지의 가방 가게가 상가에서 쫓겨나게 된 상황에 대한 걱정을 가족이 나누기는 하지만 대개는 만두를 어떻게 빚고 삶느냐에 관한 설왕설래가 대화의 전부다. 리우지아인이 연기하는 딸은 이 상황에서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고 나름대로 까탈스런 면모만 드러나는데, 이를테면 부추를 썰 때 자로 길이를 맞춘다든가, 만두소에 돼지 비계를 너무 많이 넣었다고 불평을 터뜨리며 저녁 식탁을 썰렁하게 만든다든가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감독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궁금하게 되면서도 일단 이 영화의 형식과 내용은 재미있다. 무엇을 찍어도, 그날 일기에 ‘오늘은 온 가족이 만두를 해먹었다’라고 간단하게 일기장에 적을 내용이 한편의 장편영화가 된 것이다. 누구나 이런 영화를 찍을 수 있겠지만 또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부터 해오던 방식으로 만두를 만드는 아버지, 어머니와 그들의 숙련된 요리 솜씨, 재료를 가다듬는 것에서부터 오래 축적된 그들의 경험을 젊은 딸은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런데도 자꾸 이것저것 간섭하고 때로는 부모의 타박을, 때로는 부모의 자상한 지도를 받는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딸이 해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당연히 그들의 감정은 알 수가 없을 듯하다. 따로 카메라가 포착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들 가족이 평소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저녁을 함께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거두절미하고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리우지아인이라는 감독의 신선한 시도이다. 몇편이나 더 이런 식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작비 대비 남는 장사라는 점에서도 이 영화는 상업적이다. 일반 상업극장에서 틀어줄지도 모르겠고 관객이 돈 주고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제 관객에게는 크게 호소력이 있는 듯이 보였다. 여기서 더 극적 개입이 필요해진다면 아마도 더 많은 앵글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 가능성을 차단하니까 이 영화가 흥미로워진다. 때로 긴 호흡으로 잡힌 앵글 안에서 등장인물의 뒤통수나 손이나 발만 잡혀도 거기에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감정구조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들 가족이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것 같지는 않다. 서로에게 일정한 불만이 있지만 함께 음식을 만드는 그 끈질긴 일상적 관습에 순응하며 사는 모습에선 가족의 관성 같은 게 느껴진다. 티격태격하지만 함께 먹는다는 운명을 공유하는 자들 특유의 의존성을 몸에 붙이고 있다. 만두 빚는 법이 서로 달라 언쟁을 벌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각자의 방식이 따로 있다. 그런데 여하튼 함께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게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집요한 관성의 세계를 이 영화는 잡아낸다.

그 모든 것이 치밀한 기획력의 소산

이것은 오래전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예언한 영화의 세계에 디지털 매체가 점점 다가선다는 징표일 것이다. 13살의 못생긴 소녀가 캠코더를 들고 영화를 만들 때 영화는 진정한 예술이 될 것이라고 코폴라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웬만큼 글쓰는 재주가 있듯이 영화 만들기에도 그런 범용한 재능이 통하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일기가 문학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나 만들 수 있는 영화가 꼭 잘된 영화가 되리라는 법도 없다. <옥스하이드2>가 실은 치밀한 기획력의 소산일 거라는 역설이 흥미로웠다. 이 영화는 그저 극적 사이즈를 작게 잡은 것뿐이고 거기서 최대치의 극적 감정을 뽑아내려 한 것이다. 다만 이런 스타일이나 창작 태도만으로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의 폭은 굉장히 넓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생각할 거리다. 대학 영화과에서도 보통 이런 창작적 태도를 가르치지는 않는다. 스토리텔링 구조나 장르의 문법이나 이미지의 구성력을 가르치지만 대개 그것들은 쓸모없는 기율이 될 뿐이다.

‘시네마디지털서울 2009’의 경쟁부문에서 본 영화가 다 흥미로웠던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졸음을 견디기조차 힘든 경우도 있었다. 중국 독립영화들은 이제 상당히 패턴화돼 있었고 실험적인 영화들은 너무 나이브했다. 일상적인 소재로 파고들어가는 다큐멘터리들도 예리한 관점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자기도취적인 영화들이 있었다. 깜냥에 비해 긴 상영시간 분량이 그 점을 증명해준다. 그렇더라도 디지털은 일상에서 끈질기게 미시적으로 구체적으로 다른 각도의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졌지만 수상에는 실패한 중국의 다큐멘터리 <고소>와 같은 영화는 오랜 세월 카메라를 붙잡고 따라다니는 일상적 실천의 전형으로 보였다. 카메라가 작고 간편해지면서 영화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아졌다. ‘시네마디지털서울 2009’는 다른 영화제에 비해 군살이 전혀 없는 영화제다. 별다른 이벤트도 없고 영화제 주변의 동선도 단순하다. 그저 영화 보고 영화에 관해 얘기하는 환경으로 꾸며져 있다. 여기서 가까운 미래에 21세기 영화의 답이 더 많이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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