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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그 근심에 몸서리가 쳐진다

타락도 구원도 의미를 상실한 <고갈>의 두려움

김곡은 <고갈>이 “불안의 이미지를 캐스팅한 영화”라고 했다. 그와 인터뷰를 한 정한석은 곡사의 영화가 “이야기를 짜는 것이 아니라 개념에 어울리는 판을 짠 다음 각각의 자리에 인물을 끼워 넣는다”고 썼다(<씨네21> 718호). 둘의 말을 종합해봐도 알겠지만, 곡사의 영화에서 우선적인 건 개념이나 이미지이고 이야기와 인물은 부차적이다. 물론 여기서 개념과 이미지가 같은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일단 그것들이 눈에 보이는 무언가이거나 현실의 언어로 명확하게 설명 가능한 무언가는 아니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에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곡사의 영화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 즉 지나치게 지적이고 명징한 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나머지 요소들을 동원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라면 오해라고 말해도 정당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복잡한 문제가 남는다. ‘말로는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 영화의 시작점으로서의 모호하지만 강력한 어떤 전체 이미지(개념)가 어떤 수단과 과정을 거쳐 형상화되는지의 문제 말이다. 그러니까 언어 불가능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야심차게 언어화한 결과물을 당면할 때의 난감함. 물론 이는 단지 곡사의 문제가 아니라 유사한 욕망을 지닌 모든 창작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이긴 하나, 특히나 곡사의 영화가 보는 이에게 던지는 고민은 흔히들 예상하듯 충격적인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고갈>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미지의 ‘배열’이 드러내는 것

<고갈>을 만든 뒤 어느 인터뷰에서 이들은 곡사의 영화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특히 여자를 대상화한다는 그간의 비판에 대해 그건 창작자의 무의식의 반영이 아닌, 세계의 반영일 따름이라고 반박한 적 있다. 상투적이고 단순한 비판과 반박 같아 보이고 양쪽의 입장 모두 딱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건 둘의 견해 차이가 아니라, 이 문제의식이 서 있는 틀이다. 예컨대 이 세계를 지배하는 불안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창녀의 이미지 혹은 상황을 택했다고 가정하자. 그때 <고갈>에서 창녀가 얼마나 폭력적인 이미지로 등장하는지의 문제는 보는 이를 불쾌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이 영화를 말할 때 핵심은 아닌 것 같다. 우선 나는 이 영화 속의 수많은 이미지들이 감독의 의도야 어쨌건 상투적이라고 보는 편이다. 이미지가 충격적이라고 해서 상투적이지 않은 건 아니며, 오히려 그 충격이 상투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다. 나는 또한 영화가 표피적으로 상투적인 이미지를 취하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렇게 의심해볼 수는 있다. 영화가 그것을 현실에서 소비되는 맥락 그대로 다시 소비하는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한 차원 더 나아갔는가. 말하자면 현실의 상투화된 이미지가 영화 속에 들어올 때, 그것이 현실에서 소비되는 맥락의 상투성까지 그대로 가져오고 있지는 않은가의 문제. 착취의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착취의 대상을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영화가 그 대상을 또다시 착취하고 있지는 않은가의 문제. 이걸 가려내는 게 조심스럽고 애매하기는 하다. 그러나 적어도 분명한 건 이 영화의 수많은 정황, 인물, 순간들 등을 알레고리로 읽는다면(곡사의 영화들을 읽을 때 제일 먼저 드는 유혹), 영화 속 상투적 이미지들은 명징한 의미를 얻게 되고, 그럴수록 상투적 맥락으로 돌아가게 될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요해지는 것은 이 영화 속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어떤 상징이나 은유 없이, 그 자체의 배열만으로 감독이 말하는 그 “불안의 이미지”라는 것을 표현하는지의 문제다. <고갈>이 그 점에서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다만 영화가 숏들을 붙이는 방식이나 인물들에게 특정 제스처를 요구하는 시점 등은 사운드 등이 자아내는 모호함의 효과와는 달리 비교적 명확한 의도를 생산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그 점이 좀 의아하다. 이를테면 영화 전체 맥락에서 수간장면이 인서트된 위치나 미친 여자가 토악질을 하고 분노를 표출하거나 굴뚝을 응시하는 시점 등이 그러하다. 세계의 불명확한 어떤 분위기를 표현하려는 영화가 일면 관습적인 재현의 틀 혹은 관습화된 재현적 이미지로 그걸 시도할 때, 좀 이상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종종 표현과 재현이 충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유독 몇몇 장면에서는 이미지가 아무런 지시체계 없이 그 자체의 지글거리는 육체만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표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된 이미지가 다른 장면들이 쌓아올린 의미, 혹은 상투성을 균열시킨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걸 말하려고 한다.

몸을 파는 미친 여자와 그걸 시키는 남자가 굴착기 소리가 들리는 벌판에서 몸싸움을 하는 장면들이 있다. 유사한 장면들이 몇번이나 반복되는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쫓기도 하고 서로를 때리다가 뒹구는 모습이다. 영화는 이들의 몸싸움을 보여주는 데 비교적 긴 시간을 할애한다. 이상한 건 처음에는 이들의 육체적인 뒤엉킴이 당연히 남자가 주도권을 쥔 싸움인 걸로 예상하지만, 볼수록 그게 싸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본능만 남은 이들의 행동이 기이하게 다정해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지배종속의 틀을 벗어난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서로 부딪치는 육체의 평등함으로부터 살짝 묻어난다. 나는 전체적으로 지옥도 같은 이 영화에서 이 장면들에서만은 약간의 위로를 얻었고, 그건 여기에 표현된 어떤 심연 때문인 것 같다. 남자와 여자가 엉켜 있는 이 동물적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주체와 대상, 나와 타자, 착취와 피착취의 경계가 사라지고 오직 (인간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든) 육체성만 남아 있다가 그마저 공기 속으로 흩어져서 궁극에는 그 세계 속으로 흡수되는 느낌이 있다. 좀 뻔한 말 같지만, 여자가 그토록 올려다보았고 영화가 자주 보여주곤 하던 굴뚝의 연기가 땅 위의 이미지로 연출된 느낌이랄까. 굴착기의 소리와 <고갈> 특유의 화면 질감은 영화 전체 중, 바로 여기서 가장 큰 정서적 파장을 일으키는 것 같다. 아무튼 감독이라면 이를 ‘소멸’의 순간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 소멸은 아름다울 수 없으니…

그런데 한편으로 이 소멸의 순간을 두고 섣불리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겠는 건 그것이 영화 속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순간처럼, 정확히 표현하면 모든 가치판단이 중지된 순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기계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은, 아무런 위계도 없고 국적과 시간성이 탈색된, 무(無)도 아니고 유(宥)도 아니며, 아무런 한계도 없지만, 무한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세계. 여자가 몸을 파는 모텔의 방이 적어도 시간을 환기하는 호루라기 소리로 지배되고, 그 안에서 죽음과 (죽은)탄생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충격적이지만 낯익은 그 방에 비해 이 세계의 낯섦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소멸의 순간이라고 부를 만한 이 세계의 이미지에서 소멸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져볼 만하다. <고갈>이 세상의 극단적 풍경을 보여주고 그 참혹함의 제거 불가능성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싸우겠다고 결심한 영화일 때, 위의 괴이한 이미지들의 순간에서 소멸되는 것은 타락 자체가 아니라, 타락을 타락으로 의미화하는 체계나 질서가 아닐까. 그곳에 분명 타락이 존재하지만, 거기에 어떤 의미도, 판단도 부여되지 않는 세계. 이 영화가 고통스럽다면 현실의 폭력을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로 제시한 부분, 달리 말해 타락의 형상화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그런 충격적인 이미지 다음에 위와 같은 소멸의 이미지로 반복 이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항과 구원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를 상실해서 끔찍해진 세계의 순간. <고갈>의 근심에 몸서리가 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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