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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해야 해, 나쁜 놈은 안돼
강병진 2009-09-17

충무로 흥행 대박전략의 숨은 네가지 키워드

[key1] ‘친절한 영화씨’가 사랑받는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웃고 울 수 있는 지점을 짚어주는 거더라.”

<해운대>와 <국가대표>를 본 한 투자관계자는 지금 한국 대중영화의 친절함을 지적한다. 물론 대중영화에 친절함은 기본 옵션이다. 다만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생각하는 적정의 친절함과 관객의 입장에서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관객이 원하는 친절함의 정도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얼라이즈 픽쳐스의 원동연 대표는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입장 변화를 이야기했다. “<박쥐>는 관람평을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며 욕을 써놓는 관객이 많았다. 만약 3, 4년 전이었다면 그 안에서 함축된 의미를 찾으려 하거나, 몰라도 모른다고 선뜻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모르면 모르는 거다.” 주제가 명확한 이야기와 쉬운 서사뿐만 아니라 웃고 울 장면에서 한번 더 웃고 울게 만드는 연출이 한국 대중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된 것이다. <해운대>에서 김휘 박사가 딸을 보내며 “내가 네 아빠다!”라고 이야기하거나, <국가대표>의 재복이 사실은 아버지를 존경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들이 직접적인 예다. 이처럼 친절한 영화들이 처한 딜레마도 있다. 친절한 영화가 가장 만들기 어렵다는 아이러니다. 원동연 대표는 “친절한 영화라고 해서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관객의 예상대로 끌고 가면 안된다. 예상은 깨주되 기대는 저버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친절한 영화로 기획한 프로젝트들이 투자받기는 더 힘들 것”이란 서영관 아시아문화기술투자 이사의 말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누구나 알고,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영화는 어떻게 차별점을 가질 것이며 무엇으로 관객을 잡아챌 것인가란 문제다. 관객의 눈높이는 한발 물러난다고만 해서 맞춰질 수 있는 게 아닌 듯 보인다.

[key2] 코미디를 기본으로 다양한 장르 섞어라

그렇다면 친절한 영화의 난제를 푸는 해법은 무엇일까. 관객의 예상과는 다른 무엇, 곧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신선하게 포장하는 무엇일 것이다. 올해 사랑받은 한국 대중영화들은 그 무엇을 ‘장르의 복합’에서 찾았다. 가족코미디인 <과속스캔들>은 음악영화를, 로맨틱코미디인 <7급 공무원>은 첩보극을 섞었다. 무엇을 바탕으로 삼고 무엇을 토핑했는지 순서의 차이를 알 수는 없다. 이를테면 <해운대>에서 재난은 휴먼코미디와 드라마를 위한 장치인데, 영화가 펼쳐 보이는 인간사가 재난을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포츠영화인 <국가대표>는 스포츠영화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휴먼드라마일 수밖에 없다.

<과속스캔들>

<7급 공무원>

<과속스캔들>과 <7급 공무원>의 투자·배급을 담당한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이진훈 한국영화팀장은 “소재와 캐릭터가 희귀할 경우 캐릭터를 가볍게 푸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할리우드가 가장 잘하는 정공법의 영화와는 다른 한국영화의 모습이다. “<과속스캔들>이나 <7급 공무원> 말고도 <해운대>나 <국가대표>나 사실 무겁거나 비루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다. 특히 <해운대>는 할리우드였다면 정말 무서운 영화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림자살인>도 황정민의 캐릭터를 허술하게 풀면서 재미를 획득한 경우다.” 사실 이미 보고 또 본 형태의 영화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코미디를 섞은 전쟁영화였고 <쉬리>는 슬픈 멜로의 서사에 첩보극을 얹었다. 특히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명명된 영화들은 기술력의 부족을 웃음과 드라마로 채우겠다는 전략으로 멜로와 코미디를 차용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 대중영화에 나타난 장르의 융복합도 같은 이유일까? <과속스캔들>을 공동투자한 디씨지플러스의 김성환 투자팀장은 “이제 한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무엇을 남겨줘야 한다는 강박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장르의 복합, 그중에서도 코미디의 토핑은 기술력의 부족을 메우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관객을 위한 봉사라는 이야기다.

[key3] 도덕률은 지키는 게 좋다

나쁜 놈을 응원하던 때도 있었다. 비리 형사, 악덕 포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길 원한 나쁜 놈. 인간의 욕망을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과감했고, 도덕률을 무시하는 행위에 쾌감도 느꼈다. 그래도 결국 착한 사람들이 우여곡절을 겪다 승리하는 이야기가 대박을 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올해 2월 <마린보이>를 개봉시킨 원동연 대표는 “주인공의 캐릭터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의 의견에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도박빚 갚으려고 마약 밀매에 뛰어들다 사람도 죽이는데, 왜 해피엔딩을 맞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더라. 지금 관객은 서사와 캐릭터의 모럴에 꽤 민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속스캔들>은 ‘책임감’에 관한 이야기였다. <워낭소리>는 아내와는 또 다른 의미의 반려자에 대한 우정과 사랑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구하고, 그러다 목숨을 잃기도 하는 <해운대>의 정서, 그리고 엄마가 모시는 딸의 버릇없는 행동을 가만두지 않는 <국가대표>에도 모럴의식은 있다. 올해 초 <과속스캔들>과 <워낭소리>가 흥행할 때는 경제불황에서 찾는 쉼터라는 의미의 분석이 유효했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단순한 분석으로 보인다. <애자>의 개봉을 준비 중인 데이지엔터테인먼트의 김동현 이사는 “이제 관객은 욕설로 만드는 코미디나 과감한 범죄묘사에 지친 것 같다”고 말한다. 사회적 현상이기 전에 한때 폭력, 살인, 구타, 욕설로 점철된 한국 대중영화의 집요한 흐름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한 것이다. 대중과 합의할 수 있는 도덕적 수준의 이야기와 캐릭터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key4] 가족이 보던가, 어른만 보던가

<쌍화점>

“이제 15세 관람가 영화는 애매해진 것 같다. 아예 12세 관람가로 낮추든지 청소년 관람불가로 밀어붙여야 하지 않을까?” <식객>과 <미인도>를 만들었고 <식객2>를 준비 중인 이성훈 프로듀서는 영화등급의 양극화를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층이 넓어진 까닭이다. ‘가족영화’의 가능성은 그동안 긍정적인 쪽으로 점쳐졌다. <과속스캔들>과 <워낭소리>가 터졌을 때가 정점이었을 것이다. <미인도>와 <쌍화점>이 흥행할 때는 그동안 숨어 있던 중년 관객의 틈새시장도 발견됐다. 관객층의 확대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물론 동네 곳곳에 세워진 멀티플렉스다. 서영관 아시아문화기술투자 이사는 “멀티플렉스 환경이 안정화 시기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예측 데이터를 수집해야 할 정도”라고 말한다. 흔히 영화의 주소비층을 20대 여성 관객으로 설정하던 것까지 확대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족영화와 중년 관객층의 가능성은 이제 그만 이야기해도 될 때인지 모른다. 영화가 애인과 함께 보는 것이란 인식만큼 가족과 함께 보는 것이란 인식이 정립됐고, 젊은 사람이나 보는 것이란 선입견만큼 누구나 볼 수 있는 게 영화라는 개념도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다시 앞서 설명한 부분들을 끌어안는다. 영화가 세대를 넘나들며 사랑받는 매체이기 때문에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친절해야 하고 착해야 하며, 부담없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사랑받은 한국 대중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과 함께 보기에도 제한적이고, 성인 관객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15세 관람가 영화의 설 자리는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