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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기억 <이태원 살인사건>
김용언 2009-09-09

synopsis 1997년 4월, 이태원 한복판의 햄버거가게에서 충격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평범한 대학생 중필(송중기)이 끔찍하게 난자된 상태로 발견되고, 10대 한국계 미국인 피어슨(장근석)과 알렉스(신승환)이 용의자로 떠오른다. 처음엔 피어슨이 살해용의자로 지목되지만, 박대식 검사(정진영)는 조사를 거듭할수록 알렉스가 진범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알렉스의 부유한 아버지(고창석)가 고용한 변호사(오광록)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재판이 거듭될수록 자꾸만 말을 바꾸는 피어슨의 수상쩍은 모습에 박 검사 역시 자신의 판단에 점점 자신감을 잃는다.

12년 전 한국을 들끓게 한 ‘이태원 햄버거가게 살인사건’은 최근까지 법대의 교재로 다뤄지고 있다. 이른바 “검사가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악몽 같은 사건”이라는 부가설명과 함께. 한마디로 시체는 있지만 범인은 없는 상황, 확률의 잔혹한 게임이다.

그 실제 사건을 둘러싼 40여명의 인터뷰이와 4년간의 고증을 거쳐 완성된 <이태원 살인사건>은 분노의 동력으로 거침없이 내달린다. 쾌락살인을 저지른 무모한 10대들에게는 최소한의 윤리의식도, 방관자로서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정된 정보 안에서 엇갈리는 증언의 제로섬 게임을 끝내기 위해 박 검사는 귀신의 도움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으로 동분서주하지만 종국엔 실패만을 곱씹는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그땐 몰랐지만 이제 와서는 말할 수 있다’는 시원스런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영화는 12년 전 사건을 재현하며 우리를 다시금 그 안으로 불러들일 뿐이다. 박 검사와 중필의 유령과 함께 사건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가 그 시대의 거대한 무력과 분노를 체험하게 한다. 그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대사는 이것이다. “이길 수는 없지만 지지는 않게 해드리겠다.” 가장 기계적이고 정확하게 진행되어야만 하는 재판 시스템이, 그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악의 앞에서 허물어지는 풍경을 우리는 똑똑히 목도하게 된다.

1997년 그 순간 한국사회는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어야 했을까. 둘 중 진짜를 찾겠다는 100%의 정의인가, 아니면 둘 중 절반씩만을 가져와 또 다른 하나를 만들어내는 편법으로라도 50%의 정의를 구현해야 했을까. 한국전쟁 이후 불평등할 수밖에 없었던 한-미관계, 그리고 가장 정의롭고 확실해야 하는 사법 시스템의 선행 조건이 거꾸로 살인범을 석방시켰다는 아이러니가 가장 하드보일드한 ‘살인의 추억’을 빚어냈다. 참혹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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