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토론>에서도 못 본 도저한 논쟁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게 될 줄이야. 신권을 둘러싼 미실과 덕만의 주장은 철권통치와 민본정치의 대립 같았다. 미실은 ‘신권을 백성에게 버리느니 (나와 같은 지배세력인) 너가 가지라’ 하고 덕만은 ‘버리는 게 아니라 앞으로 누구도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맞선다. 이거 너무 재미있잖아. 안 그래도 <선덕여왕> 덕분에 월요병 없어진 이들 많은데, 요즘 부쩍 말랑해진 지상파들의 어느 시사토론보다 날이 서 있다. 둘의 대립과 논쟁의 묘미는 적을 인정하고 질투하며 배우려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사가들이 당시 정권의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한 기록 말고 전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충실한 기록이 있다면 얼마나 더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까 싶다. 기록이 없으니 마음대로 지어낼 수 있다고? 정사의 뒷받침이 없으면 상상의 폭은 그만큼 줄어든다. 당대의 꽃미남이자 ‘미스터 신라’들인 화랑들이 친위부대로 (드라마 속에서) 전락한 이유도 여기에 있잖아. 팩션이 그냥 팩션이냐.
자신들의 ‘자뻑 사관’을 굳이 교과서에 집어넣겠다고 난리를 친 집권세력과 뉴라이트들은 천년만년 자신들의 호시절이 이어지리라 믿은 걸까 아니면 겁이 난 걸까. 올 초 저자들의 동의없이 강제로 내용이 고쳐졌던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해 법원이 발행·판매·배포 중단 판결을 내렸다. 부끄러운 과거를 옹호하고 북한을 깎아내리는 게 주된 수정 내용이다. 법원이 저자들의 저작인격권 침해를 인정한 것은 교육과학기술부의 수정 지시가 잘못됐다는 뜻이다. 애꿎은 출판사가 대신 매를 맞고 있지만 아니나 다를까 교과부는 출판사를 통해(!) 항소하겠다고 했다. 내놓고 출판사를 산하기관으로 둔갑시켰다.
자뻑 이념이든 자뻑 사관이든 블로그에 올리면 될 것을 굳이 여러 사람 피곤하게 교과서에 넣으려고 애쓰는지 안타깝다. 그야말로 수능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시험에도 안 나오는 내용인데 말이다. 이렇게라도 존재감을 한줄 걸쳐 후세의 사극에 등장하고 싶은 걸까.
참, 저작인격권을 존중하다 못해 드물지만 간혹 오타까지 그대로 게재해주는 씨네리에 이 기회를 빌려 감사 말씀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