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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불편한 진실을 말할 자유

신앙의 위기에 봉착한 시대에 대해 <독>이 내린 징후적 진단은

올여름 한국 공포영화의 체면을 살린 <불신지옥>과 <>은 여러 면에서 비교 선상에 놓일 만하다. 믿음 내지는 신앙의 참담스러운 파괴를 주제로 한 두 영화는 악령 들린 아이와 귀기 서린 아파트, 작중인물을 파국으로 이끄는 신앙적 열의라는 모티브를 공유한다. 오컬트 호러적 색채의 유사성은 물론이거니와 종교의 문제를 원리적으로 해명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는 데에서도 두 영화의 친연성이 확인된다. 인간과 신성의 분열 양상을 그 근저적 테마로 다룬 공포영화가 동시에 짝을 이뤄 나왔다는 건 퍽 흥미롭다. 하지만 우연의 소산일지 모를 작의(作意)만으로 한국 공포의 새로운 경향을 두 영화 안에서 읽어내는 것 역시 침소봉대의 위험을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신앙의 위기에 봉착한 시대에 대한 징후적 진단으로서 이들 공포영화의 출현을 맥락화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알리바이로서 믿음이 성립되나니

항간의 한국 공포영화 관습에 빗대어 <>은 유별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남들처럼 행복해지고 싶은 한 가족을 감싸고 도는 공포의 실체를 굴착한 이 영화의 서사는 일상의 표면 뒤에 은폐된 음울한 과거사를 동력으로 삼았다. 치명적인 기억을 묻어버리려는 김 사장(임형국)의 가족들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괴이쩍은 현상들, 상서롭지 못한 기운에 감싸인 낡은 아파트와 음침한 이웃집 사람들에게 조종당하다 파멸하기까지 그들을 조여오는 불안과 망상이 장르의 관습 안에 용해되어 있다.

김 사장 가족의 불경스런 히스토리가 하나씩 폭로되면서 <>은 표면적인 스토리 이상으로 나아간다. 공포의 기원은 죄의식에서 나오는데, 죄책으로 인한 용서의 갈구가 인간이 처한 막다른 골목이 돼버렸다는 점에서 이 죄의식의 새로운 국면이 열린다. 김 사장 일가의 죄는 신성한 과실을 취한 대가로 낙원에서 내쳐진 아담과 이브의 원죄가 아니요, 천국으로 가는 통과의례로서의 속죄와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속죄의 의미가 퇴색한 현대적 환경에서 종교는 세계의 구원이나 인류의 구원과는 동떨어져 점점 개인의 구원에 매달리게 되지 않았는가. 이같은 당대적 상황에서 믿음과 신념의 체계가 성립되는 과정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부터 <>은 새로운 스타일의 공포영화가 된다.

여기서 재차 <불신지옥>과의 견주기가 유용해진다. <불신지옥> 역시 높은 수위의 도덕성과 금욕적 견결함을 요구하는 참된 신앙에 육박하지 못하는 종교의 퇴락을 주제로 한다. 사악이나 이기심을 교정하려는 계몽은 공포영화의 오랜 기능이었으나 <불신지옥>과 <>은 신앙의 문제와 그것을 결부시켰다는 점에서 나름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악령을 퇴치하는 종교의 힘을 전면에 내건 오컬트 영화와 달리 두 영화는 이 세계가 광신적인 믿음의 과잉으로 인해 진정한 신앙의 결손이 횡행함을 보여주려 한다. 그 전제가 되는 건 오늘날 인간의 편의에 의해 종교가 변질되었고, 절대자를 향한 참된 신앙이 개인의 구원을 위해 희생된다는 가설이다. 내세의 약속이나 구원보다 지상에서의 도락만을 희구하는 한국사회의 기복적 종교관의 소산이라도 하겠지만,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다시 <>으로 돌아와 극중 김 사장의 신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신의 영성 앞에 엎드린 자의 고백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기 위한 속죄의 방편으로서 신앙이다. 나을 만하면 다시 탈이 나고 마는 그의 손가락의 설 아문 생채기는 과거의 어떤 심리적 상처와 긴밀히 이어져 있다. 별 저항 없이 기독교 신자가 된 김 사장은 죄사함의 대가로 수백만원에 이르는 헌금을 교회에 바친다.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속죄가 이루어지기보다 죄에 대한 알리바이로서 믿음이 성립되는 형국이다. 김 사장은 어렵게 시작한 사업의 번창을 빌며, 식탁 앞에선 가정의 안녕과 무사를 기도한다. 이제 회당은 세속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는 ‘사면의 전당’이거나 일신의 소망을 충족하려는 ‘민원의 전당’인 것이다.

한국사회 신앙 메커니즘을 파고들다

개인 영리를 수호하는 것으로 근근도생하는 종교의 전락을 형상화하는데서, <>의 시각 전략은 한국적 신앙의 배타주의와 폐쇄성을 공간의 폐쇄성을 통해 드러내려 한다. 흔한 괴담류에서 사용되는 전형적인 호러의 담화방식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가는 특유의 무드를 통해 공포가 가중된다. 그런 의미에서 망령된 기운을 풍기는 김 사장의 오래된 아파트는 흡사 윤종찬의 <소름>의 무대가 되었던 미금아파트를 연상케 한다. 독 안에 감금되었던 김 사장의 끔찍한 기억처럼, 그것은 수챗구멍에 엉킨 머리카락, 언제 멈출지 모르는 엘리베이터, 녹물이 쏟아지는 수도가 자아내는 인상이고, 넋 나간 말들과 돌연한 히스테리, 전혀 독실함이 느끼지 않는 어설픈 기도에서 감지되는 어떤 정서다.

영화학도가 연출한 습작 이상의 함량을 지녔지만, 장르영화로서 <>은 결함이 많은 영화다. 드라마는 잘 계산되거나 제어되었다고 보기 힘들뿐더러 만듦새는 성기고, 연출은 아마추어적이다. 비명이 터질 만한 장면을 줄줄이 엮어놓지도 않았다. 사건의 전말을 속 시원히 말해주는 법이 없는 장르의 관습상 김 사장 일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답은 끝까지 유예된다. 즉자적인 쇼크에 호소할 의사가 전혀 없는 김태곤의 연출은 인물의 말과 행위에 숨은 의미를 소급해가는 쪽으로 관객의 주의를 유도한다. 김 사장 내외는 왜 그리 장 권사 집 치매 노인을 경계하는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김 사장이 유별나게 꺼려한 이유는 무엇인지, 악령 들린 아이의 해괴한 언행이 어디서 기원하는지 등을 이 신중한 연출은 조심스레 더듬는다.

<>에서 묘사 수준의 괴기함은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 있다. 날이 갈수록 세속의 가치로 치환되는 한국사회의 신앙 메커니즘을 파고드는 것이다. 이 시대의 신앙은 죄의식에서 나왔지만 그 죄는 고백되고 뉘우쳐진 죄가 아니요, 은폐되고 묻어버리려는 죄이다. 이러한 인식은 삶을 부단히 괴롭히고 오손해온 신앙의 질곡을 제대로 보자는 자기반역의 소산이다. 이쯤 되면 왜곡된 신앙의 인간을 대량으로 사육하는 체제, 패륜적 악행마저 사면된다고 여기는 그릇된 믿음, 사사로운 영리에 따라 운용되는 현대적 신앙의 작동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장구한 제 종교의 역사를 통해서도 여전히 미해결인 질문이 여기에 남는다. 신앙은 인간의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신의 이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점잖은 장르영화가 하기 힘든 거북스러운 진실을 말할 자유가 공포영화에 주어진 특권이라면, 이 질문으로 인해 <>은 그 특권을 효과적으로 누린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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