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했다. 얼마 전 사무실에서 책 담당 이다혜 기자의 책상을 지날 때였다. 수북이 쌓인 책더미에서 제목 하나가 눈길을 잡아당겼다. <징징거리지 마라>. 아니, 그 말은 내가 우리집 아이들에게 입이 닳도록 하는 잔소리가 아닌가. 필이 번개처럼 왔다. 마침 아홉살 난 딸아이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라, 장난삼아 그 책을 선물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니가 귀엽긴 하지만 지긋지긋할 때도 많단다. 그러니 제발 그만 좀 징징거려라”란 뜻으로.
이 책의 지은이인 재뉴어리 존스는 ‘징징거림 비평가’를 자처하는 미국인 할머니다. 그는 세대별 징징거림의 유형을 들고 대처방법을 제시한다. 가령 10대들의 징징거림 톱3는 TV와 컴퓨터, 숙제와 성적, 용돈 순이다. 아이를 둔 부모라면 그 징징거림에 직면하는 스트레스를 잘 안다. 때로는 환장할 정도다. 그렇다고 이 책이 징징거림을 퇴치하는 대단한 비책을 담지는 않았다. 상식적인 수준이다. 지은이는 “우리가 진짜로 징징댈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은 구분해야 한다”며 전쟁에 대한 건강한 징징거림 따위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더불어 단순한 감정적 반응으로서의 징징거림은 웃음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맞다. 그걸 몰라서 징징거리는 게 아닐 뿐.
어른들도 참 징징댄다. 돈이 없다고, 일이 많다고, 집에 빨리 들어오라고 징징댄다. 선후배간에, 부부간에, 부모자식간에 징징댄다. 모두가 징징댄다. 내 생각으론, 근본적 처방은 없다. 솔직한 감정의 분출로서 일정한 징징거림은 정신건강에도 좋다. 다만 적절한 타이밍에 뚝! 그쳐야 주변 사람들이 안 피곤하다. 내가 아는 한 선배는 징징거림이 습관이다. 15년 전부터 쉼없이 징징댔는데, 요즘 만나도 비슷한 레퍼토리로 징징댄다.
지난주 나도 많이 징징댔다. 색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나흘간 총 15편의 영화를 봐야 했다. 첫날 아침엔 그 많은 영화를 어떻게 다 소화하냐며 살짝 징징댔는데, 두편을 보자마자 그 수위가 더 높아졌다. 영화가 내 코드와 맞지 않아서였다. 하긴 77분간 대사 한마디 없는 영화가 누구 코드엔 쉽게 맞으랴. 다음날엔 러닝타임 세 시간짜리가 왜 이리 많냐며, 다다음날엔 ‘하루 10시간 관람 중노동’으로 목이 잠기고 피곤해서 스크린에 눈이 안 간다며 징징댔다. 크게 떠들지는 않고 혼잣말로 징징댔다. 결과적으로는 특별한 체험이었고 행복한 징징거림이었다. 간혹 지루한 작품이 없지 않았으나, 기존의 상업영화에서는 결코 접하기 힘든 인상적인 세계였다. 꽤 흥미로운 내용도 많았다. 등장인물이 달랑 세명일 때조차…. 8월25일 폐막한 시네마디지털서울 장편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이야기다(그 영화제의 주인공들이 궁금한 분들은 20쪽 및 72∼76쪽으로). 앞으론 덜 징징거려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