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책> 우르스 비트머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박후기 지음, 창비 펴냄
프랑스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작별은 작은 죽음이다. 죽음이 남은 자의 마음에 음영을 드리우는 것은 그래서다. 최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초상을 줄줄이 치르는 이쪽 입장에서는 그 ‘작은’ 죽음도 사람마다 다른 작음임을, 그래서 이것이 특별한 죽음임을 세상의 모든 수사를 동원해 강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겠으나 엄밀히 따져 하나의 죽음은 하나의 죽음이다. 그리고 노통의 부고를, DJ의 부고를 차례로 접하면서 나는 내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했다.
아버지나(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해본 사람이라면 공유하는 경험이 있다. 자식에게서 받은 선물을 꼭 쓰지 않고 뜯지 않은 채 곱게 보관해놓은 것. 그 고이 아껴둔 마음씀에 진득하니 묻어 있는 (결국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 때문에 유품 정리는 눈물로 얼룩지게 마련이다. 우르스 비트머의 <아버지의 책>에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남겨진 그의 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방에 들어가 이것저것 살펴보자니 몸이 오싹해졌다. 카우치 위에는 아랍풍 혹은 러시아풍의 덮개가 덮여 있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애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누군가의 죽음 전날과 그 다음날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남겨진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렇기 때문에 큰소리로 곡을 하는 것이다. 그 죽음의 메아리를 산 사람들이 내는 것이다. <뉴요커>에 실렸던 켈리파 새너의 <추모: 마이클 잭슨>을 읽다가 가장 울컥했던 부분도 그 메아리, 사실은 서울에서도 느꼈던 그 메아리에 관한 대목이었다.
“뉴욕의 목요일 밤은 뜨거웠다. 몇 주간의 비 끝에, 진짜 여름밤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도시의 자동차들은 모두 창문을 열고 있었고, 틀어져 있던 라디오 방송국 채널은 모두 마이클 잭슨에 맞춰져 있었다. 처음으로(그리고 우리 모두 알다시피, 마지막으로), 마치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같은 노래들을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믿는 종교의 교리와 달리 사후세계를 별로 믿을 생각이 없었던 나는, 갑작스러웠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사후세계를 긍정하게 되었다. 안 그러면 너무 억울하잖나. 내가. 그래서 오늘 나는 작은 리사이틀을 상상한다. DJ와 아버지가 객석에 앉아 있다(아마 지긋지긋하도록 ‘우리’ 걱정을 하고들 있겠지). 무대 위에는 우리가 이제 보지 못하는 MJ의 문워크라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시 한편. 날이 날이라 사랑에 관한 시를 읽어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 시절 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울게 되었듯이, 밤의 정전 같은 이별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사랑의 물리학-상대성 원리> 중에서,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박후기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