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초년 시절 야당 총재이던 그를 처음 만났다. 선배가 진행하는 인터뷰에 녹음기 등을 챙겨 따라간 자리였다. 인터뷰 내내 눈도 못 마주치고 그의 넥타이만 뚫어져라 쳐다봤었다. 인터뷰를 끝낸 뒤 그가 문득 나에게 물었다. “김 기자는 궁금한 거 없어요?” 당황한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어이없게도 “넥타이는 누가 골라줬나요?”였다. 어휴 미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가 답했다. “아내가 골라줬지요. 내가 원래 빨간색이 어울리는데 빨갱이 소리 듣기 싫어 안 매지요.” 그 뒤 심부름하러 쫓아가는 인터뷰일지라도 꼭 질문을 연습삼아 중얼거리곤 했다. 이듬해 대선을 앞두고 금융정책에 관한 토론회 자리에서 그를 또 만났다. 토론을 끝낸 그가 참석자들과 악수하는 사이 나는 구석에 앉아 어려운 경제용어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가 절룩거리며 다가오더니 악수를 청했다. 내 이름과 소속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놀란 나머지 “멜빵도 참 잘 어울리시네요”라고 말했다.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런 멍청한 짓들과 연결돼 늘 부끄럽고 고마운 어떤 것이다.
비록 그의 판단력과 총기를 의심하고 흉본 나날도 있었지만 고백하건대 그를 안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했다. 그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낸 옥중서신을 지루한 영어책 아래 깔고 보며 일찍이 부부생활을 탐구하는 10대를 보냈고, 그가 정치적 좌절과 투쟁과 오욕과 성취의 드라마를 온몸으로 보여줄 때 나름 그 못지않은 청춘드라마를 찍으며 20대를 보냈다. 그리고 그의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이 되어 30대를 맞았다. 힘없고 아픈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알던 따뜻한 대통령, 꽃을 잘 가꾸던 섬세한 남편, 자신을 사형시키려던 이마저도 임기 중 “가장 편안하게” 대했던 통 큰 보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영민하며 유머 넘치던 선생님, 자신의 반쪽을 잃은 슬픔과 평생을 일군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화해의 위기에 마지막 숨을 몰아 통곡했던 지도자…. 그를 가까이 접할 기회를 가졌던 것은 축복이다. 동시대를 산 것은 영광이다. 누구보다 크게 울 줄 알고 누구보다 견딜 줄 알며 누구보다 싸울 줄 알고 누구보다 용서할 줄 알던 그에게 큰 빚을 졌다. 고마워요 김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