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한 세월을 말없이 사셨던 분, 여기 잠들다.” 1912년생인 아버지께서 80년대 말에 돌아가셨을 때, 10남매 중 막내인 내가 맡아 지은 비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우리 현대사 격동기를 맨몸으로 견디며 사셨던 내 아버지와 비슷한 세대의 분들을 생각하면 존경과 안쓰러움이 교차한다. 한국 현대사의 거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1924년생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국민의 정부로부터 각별한 도움을 받아 어느 정도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놓을 수 있었던 영화계 사람으로서, “우리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으나, 나는 늙고 힘이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한 그분을 떠나보내려니, 막 철들자 떠나보냈던 내 아버지 생각이 겹치며, 참으로 복잡 미묘한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 국민의 정부 문화정책의 기조이다. 이 말 속에는 지원은 적고 간섭은 넘쳐났던 과거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의 왜곡된 문화정책에 대한 비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몸담던 한국영화연구소와 신생 매체 <씨네21>이 영화검열 철폐 캠페인을 열심히 벌이던 1996년 10월4일, 헌법재판소는 영화(진흥)법의 영화심의 조항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다. 국가기관인 공연윤리위원회가 영화 내용을 “제한하거나 삭제” 하도록 보장한 제도가 헌법이 보장한 언론·출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조항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해 4월 개정된 법에는 공윤이 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이름만 달라졌을 뿐 등급부여 보류라는 검열조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시 집권당 신한국당과 “심의받아서, 좋은 영화 못 만드냐?”며 자해행위를 저지른 영화계 일부의 공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법 개정 논의가 이뤄지던 와중에 당 대표가 되고 다시 대통령 후보가 된 대법관 출신 이회창씨와 신한국당이 이런 위헌적이고 비민주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공중도덕과 사회윤리”를 빌미로 언론·출판으로부터 영화와 연예를 분리해내고 이 영역에 대해서만은 검열을 하도록 했을 정도로 대중문화를 폄하하고 억압한 ‘제3공화국 헌법’(1963년)과 군사정부의 반문화적 가치관을 고스란히 계승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계는, 1985년 9월에 열린 한-미영화협상에서 결정된 외화 수입 자유화와 할리우드영화 직배 같은 급격하고도 대책없는 시장개방이 불러올 후폭풍을 우려하면서, 검열제도 폐지, 영화진흥공사 개편과 재정적 지원 등의 보완조치를 정부와 정치권에 요청하였다. 처음엔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도 이런 조치에 동의했고, 정치지형만 놓고 보면 영화계가 바라던 영화법 개정이라는 성과를 곧 거둘 것처럼 보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1990년 1월 김영삼 총재가 3당 합당에 전격 합의하고 민주자유당이 생기면서 영화계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서 내각책임제에 의한 최초의 총리 제안을 받고도 명분이 없다며 거부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영화계가 보기에 유력 정치인 중에서 오직 그만이 영화정책에 대한 일관된 태도를 보여줬기 때문에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영화계의 호응은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김지미에게 마음의 빚 있었지만…
영화관쪽의 볼멘소리를 받아들여, 영화 제작편수가 적다는 이유로 법에서 정한 스크린쿼터를 멋대로 줄여주는 정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는 정부와 정치인·민족영화연구소·스크린쿼터감시단·한국영화제작가협회·한국영화연구소 등을 통해 다양한 정책적 대안을 내오면서 수없이 많은 좌절을 맛보았던 내가 1997년 김대중 후보의 대선 공약 수립에 참여했던 데는 이런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제도 폐지와 창작의 자유 보장, 정부 예산 1% 이상의 문화예산 확보, 21세기 고부가가치 산업인 문화산업 집중 육성, 한국영화 진흥을 통한 문화 정체성 보호, 자율적인 방송언론 문화 창달”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다는데, 어찌 반갑지 않았겠는가? 그해 가을 부산영화제 개막식 다음날 아침에 열린 파라다이스호텔 조찬 회동은 영화계에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현 정부 들어 제 세상을 만난 듯 설치는 사람들과 수구 언론은 영화계 좌파와 국민의 정부 시절의 386 참모들이 영화정책을 왜곡시켰고 편 가르기식 편파지원을 일삼았다고 주장한다. 검열을 당당히 옹호하던 그들이 자기 편한 대로 사실을 ‘왜곡’하는 거야 따로 다룰 일이고, 나는 정반대로 당시에는 “한국영화 진흥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네트워크 형성과 권한 배분, 의사결정 방식”으로서의 민주적인 영화정책 거버넌스가 작동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적인 리더십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고 분명히 주장한다. 민주화 운동의 동지로서 사선을 함께 넘나들었던 문익환 목사와의 각별한 인연이 그 자식으로 이어진 경우를 제외하고, 사실 영화계 특정인에게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은 김지미 전 영화인협회 이사장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독재정권의 감시와 탄압에도 그의 기자회견장에 동석해줬던 통이 큰 배우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럼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정책에서의 민주성과 합리성을 중요시했다. 친소관계에 좌우되거나 누구 말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쉬리>와 <…JSA>의 시대를 열다
이런 민주성, 포용성, 개방성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리더십과 좋은 문화정책 거버넌스의 효과성은 IMF 구제금융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나온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의 최대 쟁점 중 하나였던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999년 3월26일, 미국의 작은 국무성 미국영화협회(MPA) 회장 잭 발렌티가 청와대로 쳐들어와 대통령 면전에서 쿼터 축소를 요구했다. 쿼터가 한국영화를 어렵게 만든다고 아주 당당하게 왜곡된 주장을 늘어놓으면서. “나는 정치인이라서, 표를 먹고삽니다. 유권자가 반대하는 일은 신중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완곡하지만 단호한 의사를 밝힌 김대중 대통령. 나중에 영화감독협회가 주관하는 춘사영화제는 영화계의 고마워하는 뜻을 모아 공개적인 방식으로 그의 공을 칭송했고, 퇴임 이후였던 그분도 행사장에 나와 영화계를 향해 기쁜 답례를 보냈다.
국민의 정부는 창조성과 다양성이 자산이 되는 지식산업을 유난히 강조했고,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도 그 덕을 톡톡히 봤다. 대선 공약에 들어갔던 영화검열 철폐, 영화계 중심의 민주적인 거버넌스 체계로서의 영화진흥위원회 설치, 영화진흥을 재원 확충과 영화 자본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투자조합 출자사업 등은 차질없이 추진되었다. 지금은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통제정책이 무차별적인 대외 개방정책으로 급변하던 상황에서, 1993년 한국영화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결과적으로 영화계에 득이 된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는 입도선매형 어음 결제에 의존해왔던 외화수입 의존적인 영화관 자본의 퇴조와 홈비디오와 결합한 산업자본의 부상을 통한 투자자본의 교체를 낳았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정치 민주화의 동력이면서 동시에 최대 수혜자였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기획자와 감독들의 등장과 영화계 다수가 뭉친 제도개선 노력. 적절한 시점에 힘을 보태주면서 미래 예측 가능성과 신뢰성을 안겨준 좋은 파트너십으로서의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 문화정책의 결합. 한국영화도 볼 만하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각인시켜준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등장. 그렇게 한국영화는 위기를 딛고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를 맞았다.
좀더 잘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왜 없을까마는, 핍박을 견디며 정말 열심히 일했던 나 자신이 대견하고 떳떳하다. 홍승태, 김종선 같은 일일이 이름을 열거하기 힘든 김 대통령쪽 정책 실무자들이 보여준 열성과 헌신이 참으로 고맙다. 공교롭게도 8월15일, 1934년생인 장인어른께서 세상을 뜨셨다. 그분과 맺은 지상에서의 20년 인연은 내가 영화/정책과 함께한 시기와 딱 겹친다. 상중에 다시 나의 가치관을 실현시켜준 좋은 지도자 김 대통령이 떠나셨다. 나는 지금 내 마음에 새길 비문을 가다듬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김대중 문화대통령’을 기억하게 할 수 있도록 애쓸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