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폐공장. 피로 얼룩진 한 소녀가 육중한 철문을 밀어젖히고 나와 미친 듯이 거리를 내달린다. 맨발바닥이 도로에 부딪치는 둔탁한 충격음과 절박한 절규가 허공을 뒤흔든다.
관객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동시에 자극하는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하 <마터스>)의 강렬한 오프닝을 보노라면 꾀를 내어 고래 뱃속을 빠져나오던 피노키오가 떠오른다. 그렇다. 어찌 보면 <마터스>는 고래 뱃속을 빠져나온 피노키오가 다시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 겪게 되는 수난기다.
소녀 루시는 유일한 친구인 안나의 보살핌 속에 성장한다. 그로부터 15년 뒤. 루시는 자신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장본인들을 신문에서 찾아내고 그네들의 저택을 찾아가 일가족을 몰살한다. 그녀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자도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던 옛말이 말짱 헛말이기 때문이다. 폐공장에서 함께 감금되었던 여자를 공장에 두고 온 루시는 자신의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환영에 시달리며 악몽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반면, 루시를 감금하고 폭행했던 가해자들은 버젓이 가족을 이루어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중산층의 나날을 보낸다. 루시의 무자비한 살인은 기괴한 형체로 그녀 앞에 나타나 물리적 폭력까지 행사하는 ‘트라우마’라는 괴물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공포와 고통에 굴복하고 만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그녀의 응징은 헛되고 헛되다. 영화 <넘버.3>에서 마동팔 검사가 내뱉었던, “깃털 하나 뽑혔다고 몸통까지 작살나는 건 아니야”라는 대사처럼 원흉으로 보였던 그네들은 비밀 조직의 ‘깃털’에 불과했다. ‘몸통’은 일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가요 재력가들이며, 그네들은 참으로 오만불손하고 추악하기까지 한 의도로 개인을 감금하고 고문하는 비밀조직이다. 같은 맥락에서 루시가 이끌던 전반부를 <마터스>의 ‘깃털’로 본다면, 루시를 돕던 안나가 우연히 저택 내부의 비밀 지하실을 발견하며 시작하는 후반부는 <마터스>의 온전한 ‘몸통’으로 볼 만하다.
‘천국을 보는 눈’이라는 불필요한 부제
외딴집에 들이닥친 극악무도한 살인마(<엑스텐션>), 임산부를 제 가족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려는 살인마 가족(<프런티어>), 출산이 임박한 임신부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불청객(<인사이드>)을 두루 거친 프랑스 호러 뉴웨이브는 모종의 의도로 소녀들을 감금 고문하는 비밀조직(<마터스>)에 이르러 화룡점정을 찍는다. 앞서 언급된 세 영화와 <마터스>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폭력을 극단까지 밀어붙이고, 무능한 공권력을 냉소하며, 타자를 향한 불신과 증오를 호러의 외피를 빌려 드러낸다는 데에 공통분모가 있다. 그러나 <마터스>는 앞선 영화들의 폭력보다 오히려 한결 순화된 수위를 취하면서도 관객에게는 한 차원 더 높은 강도의 정서적 충격(혹은 고문)을 선사한다. 화면이 밝아질 때마다 거한이 강철 족쇄에 묶인 안나를 맨주먹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둔중한 충격음과 그 창백하고 차디찬 금속성의 ‘고래 뱃속’을 영영 빠져나갈 수 없을 듯한 절망감은 앞선 그 어떤 영화보다 더 관객을 고통스럽고 곤혹스럽게 한다. 그리고 안나와 관객이 고래 뱃속의 위장과 창자를 거쳐 마침내 말미에 다다른 순간 결정타를 휘두른다.
감독 파스칼 로지에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마냥 ‘좆 같다’. 초반부에서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하려는 일군의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루시와 안나가 보호받아야 할 상황에서 구원의 손길은 그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정의는 죽은 지 오래이며 불의는 권력을 빌려 약자를 짓밟는다. 파스칼 로지에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고 절망적인 안나의 수난기를 관객의 눈앞에 들이대고, 관객은 그가 엔딩 직전에 밝히는 ‘Martyr’의 또 다른 의미대로 ‘목격자’가 된다. 그는 묻는다. 이렇게 좆 같은 세상이라고, 그래도 살아보겠느냐고.
‘천국을 보는 눈’이란 뜬금없는 부제는 그 자체로 스포일러일뿐더러 파스칼 로지에가 열어놓은 영화의 결말마저 멋대로 왜곡하는 사족이다. 대체 이 영화의 어디에 ‘천국을 보는 눈’이 등장한단 말이며, 안나가 마지막에 본 것이 ‘천국’이라고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처럼 시리즈가 아닌 바에야 원제에도 없는 부제 따위는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홍보사의 장삿속에서 비롯된 어이없는 부제 붙이기 폐단이 하루빨리 근절되기를 바란다). 피노키오야 고래 뱃속에서 탈출해 푸른 머리 요정을 만나 진정한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끝을 맺지만 이 영화는 끝까지 ‘고래 뱃속’에 머문다. 게다가 안나가 과연 공포와 고통의 극단에서 ‘잠수종’을 벗어던진 ‘나비’가 되었는지, 모종의 종교적 체험을 하고 고통을 초탈했는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공포와 고통을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을 뿐인지 <마터스>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래전 KBS2에서 <냉동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됐던 웨스 크레이븐의 TV영화 <칠러>(Chiller)에서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깨어난 마일스는 악의 화신이 되어 이렇게 묻는다. “죽은 뒤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그는 딱 잘라 말한다. “아무것도 없어.” 안나의 증언을 귓속말로 전해들은 마드모아젤이 “그럼 계속 궁금해하게”라는 대사에 담았던 저의도 어쩌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억측해볼 뿐이다.
이곳이야말로 고래뱃속이네
파스칼 로지에는 <마터스>를 통해 “신이 떠나고 없는 사회를 그리고자 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이 영화에 담아낸 현실은 프랑스에서 근 9000km나 떨어진 이 나라의 그것과도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강한 자 앞에서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 한없이 강하기만 한 정부, 국민 개인의 안녕과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위정자들과 권력의 개가 되어버린 공권력, 허울 좋은 반어로 전락해버린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파스칼 로지에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현실 대응책은 단 두 가지뿐이다. 루시처럼 공포와 정면으로 맞서다 끝내 한계를 못 이겨 자멸하거나, 안나처럼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나 현실을 완전히 망각하거나. 전자와 후자 모두 암담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파스칼 로지에의 말대로 우리는 ‘신이 떠나고 없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터스>가 진정으로 무섭고 소름끼치는 영화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김종일 호러소설 작가다. 대표작으로는 <몸> <손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