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위의 단체사업지원은) 국민들의 세금을 특정 이념 지향의 운동단체들에 지원하는 격이어서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단체사업지원이 실제로는 이념적 조직들의 후원금으로 전용된 것 같은 의혹이 있습니다… (중략)… 4기 영진위는 (과거) 단체사업지원의 실패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고 있으며 어떤 개선반응을 갖고 있습니까?”
지난해 10월17일, 영화진흥위원회를 대상으로 한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보수 성향의 국회의원들은 영진위의 단체사업지원이 한-미 FTA 협상 반대 시위와 광우병 대책회의 촛불시위에 참가한 ‘불온’ 세력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비난했다. 보수의 편에서도 한동안 좀처럼 제기하지 않던 ‘색깔론’이었는데, 올해 들어 눈앞의 현실이 되고 있다. 현 정부의 전방위적 좌파적출 공세는 도를 넘어선 지 오래이며 “비교적 자율적인 사업 추진이 가능하다고 믿어왔던”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원로단체들과 신생단체들이 대거 선정
영진위가 7월16일 발표한 ‘2009년도 영화단체사업지원’ 결과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인디포럼 작가회의의 ‘인디포럼 2009’, 전북독립영화협회의 ‘제9회 전북독립영화제’,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제13회 서울국제노동영화제, 인권운동사랑방의 제13회 서울인권영화제,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의 등 그동안 영진위가 지원해왔던 단체들의 주요 사업들은 이번 심사 결과 모두 제외됐다. 69개 사업이 접수됐으며, 이중 28개 사업에 지원키로 한 이번 결정에서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아시아-태평양 프로듀서네트워크,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의 ‘스크린쿼터 준수 검증 및 한국영화산업의 진흥과 다양성 확보를 위한 사업’ 등도 빠졌다.
반면, 정책사업 중 한국영화인복지재단의 ‘영화인 명예의 전당 헌액 사업’은 지난해 1900만원에서 4천만원으로, 한국영화인협회의 대종상영화제는 2억3120만원에서 2억9800만원으로, 한국영화감독협회의 춘사대상영화제는 5200만원에서 8천만원으로 지원금이 상향 조정됐다. 자유공모사업에서도 원로단체들과 신생단체들이 대거 선정됐다. 한국영화기획프로듀서협회의 ‘대한민국 어린이, 청소년 연기대상’(500만원), 한국영화인원로회의 ‘다큐멘터리 한국영화전사’(2500만원), 한국영화인협회 안산지회의 ‘제3회 상록수 단편영화제’, 비상업영화기구의 ‘제1회 2009 왓이즈시네마 페스티벌’, S3D FEST 운영위원회의 ‘제1회 S3D 영화제’(1천만원), 한국영화기자협회의 제1회 한국영화기자협회 올해의 영화상 시상식(620만원), 서울국제초단편영상제의 ‘제1회 서울국제초단편영상제’(1천만원) 등이다.
영진위 영상문화조성팀의 한 관계자는 “예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면서 “기존에 지원받았다가 못 받은 단체들가 있다는 점이 특이하긴 하지만 이는 감사원의 감사를 받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감사원이 5월부터 영진위의 민간 경상보조 사업에 대한 감사를 진행 중인데 “아직 결과가 나온 상태는 아니고, 감사 주체가 아니라서 어떤 내용인지 말할 수 없지만 지적 사항이 나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감사원의 지적 사항이 단체사업지원의 결정심사에 여파를 미쳤다고 봐도 되나, 인디포럼·노동자뉴스제작단·인권운동사랑방 등의 예년 사업 평가 점수가 저조했던 것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서 영진위쪽은 더이상의 답변을 거부했다. 해당 사업의 결정심사 회의록 열람 또한 아직 위원들의 승인을 받지 못해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 영진위쪽의 입장이다.
위원장 대행 체제, 문광부 눈치만 보나
매년 똑같은 단체만 지원할 순 없지 않느냐.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영진위의 이번 단체사업지원의 경우 그 과정이 비상식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심사 기준은 상식적으로 수긍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인권운동사랑방에 따르면, 7월14일 단체사업지원 최종 결정심사가 있기 며칠 전 영진위 김OO 팀장은 전화를 걸어와 “지난해 촛불집회에 나간 적이 있느냐”, “광우병 대책위에 소속되었느냐”고 캐물었다. 영진위 담당자의 이같은 행동이 사실이라면 올해 단체사업지원에서 영진위의 심사기준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영진위는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혔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단체들에 단돈 10원도 주지 마라”는 엄명은 괜한 소문은 아닌 듯하다. 영진위가 해당 단체들에 내려보낸 ‘2009년도 예산 및 기금운용계획 집행지침’에 따르면, “불법시위를 주최, 주도하거나 적극 참여한 단체”, “구성원이 소속단체 명의로 불법시위에 적극 참여하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처벌받은 단체”의 경우 각 중앙관서의 장은 “보조금의 지원을 제한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맘에 들지 않으면 돈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인권영화제쪽이 “(영진위의 단체사업지원 결과에 대해) 분노하지만 대응하지 않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떻게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일방적으로 관철될까. 영진위의 한 관계자는 “가장 큰 문제는 영진위가 입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건 지난 1년 동안 계속되어왔던 문제다. 특히 위원장 대행 체제에서 더 심각하다. 공공기관이니까 위쪽 눈치를 본다 하더라도 너무 알아서들 기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단체사업지원에서도 최종 결정심사의 경우 대개 지원금 정도를 조정하는 선에서 끝나는데 이번엔 그렇지 못했다”면서 “문화체육관광부의 눈치를 보느라 영진위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모르는 우스운 꼴이 됐다”고 덧붙였다. 영진위의 올해 영화단체사업지원 접수가 3월16일부터 25일까지 이뤄졌으며, 4달이 지나서야 심사결과를 발표한 것도 이러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새 위원회 구성에도 큰 기대 어려울 듯
단체사업지원이 아닌 여타 사업 또한 영진위의 무원칙을 드러낸다. 영진위의 한 위원은 “마스터영화제작지원의 경우 강한섭 전 위원장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것이라 회의에서 세칙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추가 지원작에 대한 재공고 역시 해당 사업팀으로부터 8월까지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재공고가 나버렸다”면서 “사무국이 전혀 제기능을 못한다”고 지적했다. 4기 영진위 출범 이후 영화계와 전혀 소통의 장을 마련하지 못한 터라 영진위 사무국에 본연의 직무 수행을 바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모른다.
사실상 해고된 강한섭 전 위원장의 뒤를 이을 4.5기 영진위는 영화계 안팎의 불신을 떨쳐낼까. 참고로 영진위는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현재 임원추천위원회 구성을 끝낸 상태다. 심상민 영진위 위원장 대행을 비롯해 김세훈, 박경필, 민병천, 이미연 위원(이미연 위원을 제외하곤 모두 사의를 표한 상태다)과 홍승기 법무법인 신우 변호사, 이병욱 전경련 산업본부장, 문철우 성균관대 경영대 교수, 박형동 문화체육관광부 영상콘텐츠산업과장 등이 임원추천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명단만으로 예단하긴 이르지만, 위원들의 면면을 감안할 때 새 위원회 구성에 큰 기대를 걸기도 어려워 보인다. 단체사업지원에서 ‘물먹은’ 단체들이 굳이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 아닐까 싶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영진위의 단체사업지원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