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영화읽기] 발랄한 실험인가 부주의한 실패인가

공포와 코미디 사이에서 혼란을 주는 <차우>가 진짜 의도했던 것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는 더없는 공포의 상황이 관객에게는 코미디로 전환되는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공포에 이미 코미디가 잠재된 경우, 다시 말해 영화가 공포 속에 코미디를 의도하는 경우가 있고, 영화의 심오한 목적과는 달리 코미디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그걸 괴수영화로 한정짓고 말해보자면 <괴물>은 전자에 속한다. 이 영화가 현실의 비현실성이 불러오는 공포를 드러낼 때, 그 부조리함이 동시에 코미디를 유발한다. 관객의 웃음은 말초적 반응으로서의 공포보다 더 공포적인 체념의 반응이며, 공포의 성공적인 확장이다. 반면 <디 워>는 후자에 속한다. 수많은 괴수영화들이 조악한 CG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어왔다면 이 영화는 오히려 뛰어난 괴수-기술의 전시에만 승부를 걸어 코미디가 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때 영화가 의도하는 공포와 스크린 밖의 웃음 사이에는 단절이 있으며, 웃음은 공포의 전락, 혹은 실패를 의미한다. 물론 코미디와 웃음을 동일시하고, 장르로서의 코미디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코미디’의 문맥을 같은 선상에서 사용한 위의 구분이 다분히 작위적이라는 문제가 제기되겠다. 동의한다. 하지만 그걸 감수하고서 이 글의 서두를 시작하는 이유는 그 틀이 올여름의 괴수 어드벤처 <차우>에서 좀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긴장을 무력화하는 난데없는 웃음코드

<차우>에 대한 가능한 불만은 아마 공포와 코미디 사이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괴수영화인 줄 알고 봤더니 코미디더라’는 식의 평이 다수인데, 여기에는 이 영화의 코미디적인 요소에 대한 긍정보다는 그걸 ‘공포의 실패로서의 웃음’으로 보는 암묵적인 동의가 자리한다. <디 워>에서는 비교적 쉽게 판단되는 문제였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일단 <차우>의 코미디는 영화의 의도에 배치되는 반응이 아니라, 영화 내적으로 의도된 것이기 때문에 이 코미디적 요소가 공포의 서사 내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이를테면 <괴물>에서 코미디는 공포의 메커니즘에 내재된, 일종의 서사적 시너지 효과를 내는 요소였다. 반면 <차우>에서는 공포적인 긴장감이 고조될 때마다 난데없는 웃음 코드가 등장해서 번번이 그 긴장을 무력화한다. 이게 아무리 감독의 취향이라고 해도, 장르의 최소한의 긴장마저 코미디의 잉여가 다 잡아먹어버려서 영화의 장르가 애초의 기획과 달리 코미디로 변질되었다는 불평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괴수영화의 긴장감이 무너지는 가장 원초적인 이유, 그러니까 이 장르의 실패한 웃음이 발생하는 때는 재현될 것으로 기대되는 바와 그것의 실패한 재현 사이의 간극(괴수의 외형적 완성도의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이 극명해지는 순간일 텐데, 이 영화에서 코미디는 그 실패를 부른 원인이자 결과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차우>를 실패한 괴수 장르라고 판단하게 만들 바로 그 지점, 즉 공포의 긴장이 어이없는 코미디로 인해 좌절되고 그리하여 장르 자체가 코미디가 되는 그 지점이 이상하게도 나는 흥미롭다. 장르적 완성도의 문제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렇게 묻고 싶다. 만약 위에서 언급한 ‘실패한 웃음’이 코미디와 공포를 적절히 조율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영화의 의도적 선택이라고 보면 어떨까? 재현될 걸로 기대되는 무엇을 재현해내지 못한 실패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재현될 걸로 기대되는 어떤 것의 재현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왜 외지인들만 멧돼지에 맞설까

대개의 괴수영화들에서 괴수(적)와의 대치가 절박한 사투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멧돼지와 벌이는 싸움은 한바탕 소동극처럼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건 코미디의 적절하지 못한 개입이 인물들의 사투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점이 아니라 왜 그것이 소동처럼 보이느냐다. 그전에 영화 속 괴수 멧돼지의 존재감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이 짐승은 영화의 중심을 떠받치기에 괴수로서의 위엄이 어딘지 부족해 보인다. 그걸 CG 탓으로 돌리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이 괴수가 변종 기계도, 낯선 생물체도 아닌 사람을 먹는다는 점만 빼고는 지극히 토속적이고 낯익은 짐승이기 때문이라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괴수가 적으로서의 충분한 존재감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실은 진짜 적이 아니라 적의 배설물에 불과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은 결국 잘못된 적과 사투를 벌이기 때문에 그 광경이 그토록 우스꽝스러운 소동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영화 속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농촌은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낚시나 하는” 곳이 아니다. 농부의 논 대신 도시인들을 위한 주말농장이 있고, 경찰보다 지역유지의 권력이 센, 자본화된 공간이다. 식인 멧돼지의 탄생 배경으로 골프장 건설, 밀렵 등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만, 좀더 근본적인 원인은 마을의 화전민 조상들, 즉 내지인들에게 있다. 말하자면 대개의 이런 장르가 대중성을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구도, 즉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해야 할 희생자로서 순수한 내부의 경계가 모호하다. 마을 경찰을 포함한 내지인들은 이상하리만치 식인 멧돼지의 등장에 태연한데, 그들에게 지켜야 할 것은 농촌의 생태계나 공동체의 가치가 아니라 자본이며, 퇴치해야 할 것은 괴수가 아니라 마을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수색대의 호들갑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지점도 여기다. 손녀를 잃은 노인을 제외하고 괴수를 쫓는 수색대는 모두 외지인들로 구성된다. 아무리 그들의 직업적 정체성을 고려해도 가족이나 삶의 터전을 잃은 것도 아닌데, 그들이 거기서 목숨을 거는 과정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게 희생정신이나 영웅심으로 설명될 성질도 아니다. 그들은 도대체 왜, 무엇을, 누구로부터 지키는 걸까. 나는 이 질문 자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과정, 즉 수색대의 행로의 무용함을 보여주는 과정이 바로 <차우>의 핵심이며 영화 속 코미디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인물들이 아무리 사투를 벌여도, 결국 멧돼지를 죽여도, 마치 허무개그를 본 듯 헛헛한 느낌이 드는 건 이 영화가 스릴러적 긴장을 쌓는 데 미흡해서가 아니라, 앞서 말했듯 애초 이 싸움이 잘못된 적을 전제로 한 소동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진짜 적은?

그렇다면 영화는 진짜 적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런 것 같지만 그게 어떤 실체로서 재현되지는 않는다. 분명한 건 오락의 본분을 망각할 수 없는 이 영화에서 재현 불가능한 서사의 구멍은 멧돼지라는 신화(화전민과 포수들에 관해 구전되는 마을의 이야기!), 혹은 잘못된 적으로 메워지고 있고 그 시스템 속에서 인물들은 비극적으로 파괴되는 대신에 끊임없이 자학하는 광대처럼 미끄러진다는 점이다. 이쯤에서 마을의 진짜 적, 재현 불가능한 어떤 심연은 결국 자본의 욕망이라고 답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농촌의 삶 도처에 뿌리내린, 더이상 외부의 적이 아니라 주체의 내부에 도사려서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자본이라고 규정하고 싶지만, 틀린 해석은 아니라도, 아니 오히려 너무 뻔해 보이지만, 그걸 정색하고 말하기가 어쩐지 꺼려진다. <차우>는 재현 불가능한 실재의 규명을 향해 긴장을 쌓아가는 영화가 아니라 그로부터 추락과 실패를 거듭하는 자신의 몸을 희화화하면서 거꾸로 자신이 재현할 수 없는 지점을 가리키는 영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차우>에 대한 호불호는 바로 여기, 이 실패의 지점을 장르의 발랄한 실험으로 보는지, 혹은 부주의한 실패로 보는지에 따라 극명하게 나뉠 것 같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