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파리에서는 유현목 감독의 별세 사실을 모르고 지나갔다. 나 역시 <씨네21>을 읽고서야 비로소 소식을 접하게 됐다. 그렇지만 내 기억으로 2005년 파리 시네마테크에서는 ‘세기의 한국영화 대작’이라며 광고가 나갔던 <오발탄>을 보러 수많은 관객이 몰려들었다.
<오발탄>이 ‘세기의 한국영화의 대작’인지 어떤지는 난 잘 모르겠다. 작품의 인기 순위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여하튼 이 작품은 분명 한국영화사상 중요한 작품이다. 대작들 대부분이 그렇듯 이 작품은 정확히 포착하기 어려우면서도 수없이 많은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영화다. 1961년작 <오발탄>은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두 형제, 즉 공인회계사 사무실 서기로 일하며 간신히 가족을 부양하는 송철호와 술집을 전전하며 소일하는 동생 송영호의 운명을 그린다. 돈이 없는 철호는 사랑니 뽑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영호는 은행을 털려다 실패한다.
2004년 부산영화제에서 만든 카탈로그에서는 유현목이 “한국 리얼리즘에 빛을 밝힌 사람”이라고 지칭되기도 했다. 한데 오히려 나 같은 외국인의 눈으로 본 유 감독은 언제나 ‘꿈’에 가까운 작가였다. <오발탄>에는 아무리 해독을 해도 싫증나지 않는 기이한 신호와 상징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주인공이 뽑지 않고 있는 사랑니는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민족의 분단? 동생에 대한 깊은 애착?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전쟁? 아니면 이 모든 걸 동시에? 그리고 또 다른 많은 것들도?
<오발탄>의 가장 놀라운 미스터리는 정신이상 노모가 끊임없이 질러대는 “가자!”라는 외침이다. 그녀는 거기서 무얼 이야기하려던 걸까? 게다가 작품의 자막은 영화를 보는 외국인 관객에게 그 외침의 미스터리를 한층 더하게 한다. 나는 <오발탄>의 복사본을 여러 편 봤는데, 어떤 영어 자막에선 “레츠 고”라고 했고, 한 프랑스어 자막에선 “갑시다”라고, 또 어떤 프랑스어 자막은 “떠나자”라고 했다. 시네마테크에서 본 <오발탄>에서는 화면 아래에서 “도망치세요”라는 거의 해석에 가까운 자막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노모의 외침이 전쟁의 폭격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지난 1993년 첫 출간된 한국영화에 대한 최초의 프랑스어 책은 한국인과 프랑스인 연구자들의 공저로, 그 책에는 또 이렇게 써 있다. “절망 속에서 어떤 구원에의 호소를 작가는 표현하려 했다.” 같은 책을 10페이지 더 넘기니까 또 이렇게 써 있다. “정신이상인 어머니는 북녘에 두고 온 고향 땅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곳에 돌아가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어느 날 나는 피터 폰다에게 그의 영화 <이지 라이더>에 대해 묻는 중이었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끝이 난다. “우린 죄다 날려버린 거야.”(We Blow It) 나는 거기서 말하려 했던 게 뭐였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을 거부했다. 이른바 “미스터리를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보고 있노라니 그 역시 모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오발탄>이 불멸의 작품일 수 있는 것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어떠했든지 간에 유 감독의 생각이 여타 다른 관객의 생각보다 더 옳거나 틀리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오발탄>이라는 영화가 우리의 상상력을 끝없이 자극하게 되는 이유다. 이제 유현목은 “간” 거다. 어쩌면 그는 세상을 “떠나간” 거다. 어쩌면 그는 “도망쳐 간” 건지, 그 누가 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