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이레 펴냄 <그냥 집에 있을걸> 케르스틴 기어 지음, 예담 펴냄
여름이다. 여행과 관련된 책이 쏟아져나온다. 도쿄 골목길에서 느끼는 이른 아침의 호젓함이라든가, 뉴욕에서는 뭘 사야 한다는 호들갑, 앙코르와트 사원 벽에 대고 비밀을 속삭이는 쓸쓸함을 비롯해 실로 다양한 장소에서의 다양한 경험이 이야기된다. 불경기 한파를 온몸으로 겪고 있어 떠날 수 없기에 그런 글이나 사진을 보면 혹하는 게 사실. 하지만 한편으로 드는 생각. 솔직히 까놓고 말해, 그렇게 좋기만 한가. 여행지에서 좋았던 일은 관광엽서처럼 서로 닮아 있지만, 여행지에서 겪은 사건사고만큼은 제각각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배낭여행자가 찬란한 영광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타지에서 겪는 찌질함과 궁상, 지루함, 짜증, 분노, 지저분함, 허기, 황당함, 소통 불가의 순간은 제각기 하나의 막장드라마가 될 만한 우연의 연속과 개연성없음 그 자체다.
빌 브라이슨이나 알랭 드 보통이 여행에 관해 쓴 글을 읽으며 느끼는 쾌락은 바로 거기에 있다. 나 혼자 개고생을 한 건 아니었구나. 비행기값 100만원 들여 떠났다가 외로움과 우울에 사무쳐 눈물 젖은 빵을 뜯는 일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거기에도 있구나 하는.
호텔로 걸어 돌아오는 길에 주변의 식당들이 있었지만, 소심한 나는 나무 널을 댄 어두컴컴한 식당에 혼자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식당에는 천장에 햄까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런 식당에 들어가려면 호기심과 연민의 대상이 될 위험을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호텔 방 냉장고에 들어 있는, 파프리카 맛이 나는 감자 칩 한 봉을 먹고 위성 방송의 뉴스를 본 뒤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보통 선생의 보통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 구질구질한 마드리드 여행담을 읽다 무릎을 쳤다. 나에게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뉴질랜드에 배낭여행을 떠났던 몇년 전 일이다. 어째 식사 때마다 묘하게 일이 꼬였다(투어 코스에서 뉴질랜드 원주민풍 식사를 신청했다가 평범한 옥수수와 감자 삶은 것이 나왔던 때의 황당함이라니). 맛있어 보이는 식당들은 차고 넘쳤지만, 그 앞을 서성일 때마다 그 안에 앉은 사람들과 땀에 절어 꼬질꼬질한 나의 행색을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선술집이라면 앞서와는 반대로, 그 안에서 득시글대며 소란스럽게 수다를 떠는 건장한 아저씨들과 뚱뚱한 아줌마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맥주를 시켜 마시는 일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저녁때만 되면 배는 고파 죽겠고 어디를 들어가자니 애매하고…. 고민하기에 지친 어느 밤, 슈퍼에 간 나는 2봉지에 2천원 정도 하는, 세일한다는 문구 아래 수북이 쌓여 있는 감자 칩을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우유를 마시면서 감자 칩으로 배를 채우는데 감자 칩은 소금맛. 짜! 짜! 짜다고! 뉴질랜드 스타일은 짰다.
너무 짠 걸 먹었나 잠이 안 와 호스텔 라운지로 내려갔더니, 호스텔 부엌에서 삼삼오오 일행들끼리 모여 밥을 짓고 있었다. 그때부터 머리가 어찔해졌다. 나도 뭘 먹고 싶었다. 우유에 감자 칩 말고. 구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구걸 대신, 콜라와 스니커즈를 사 먹고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무려(!) 유료 인터넷에 접속해 싸이월드 방명록까지 확인했다. 왜 혼자 여행을 왔던가, 하는 부질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설상가상으로 커피 자판기가 돈을 먹어버렸는데 항의할 기운도 없었다. 그곳에서 좋았다고 두고두고 기억하는 몇 순간이 정말 좋았던 건지, 들인 돈과 고생이 너무 아까워서 자기 합리화의 달인이 되었을 뿐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 뒤로도 나는 가능한 모든 기회를 잡아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