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남 고민남 고민 상담한 안미남 상담남 고민 해결한 미남 고민남 안녕하세요, 저는 일산 ‘변두리’에 거주하는 미남 고민남(39·소설가)입니다. 일산 ‘중심부’에 거주하는 안미남 김연수 작가님(40·소설가)께서 보내주신 상담글은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제 고민 사연은 <한겨레> esc 지면의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에 보냈던 것인데,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한겨레>와 <씨네21>이 같은 건물에 있기 때문에 생긴 착오가 아닌가, 저 혼자 추측하고 있습니다(설마 제 고민 사연을 가로챈 건 아니겠지요?). 원하는 분께 상담을 받지 못하여 실망이 크긴 하지만 김연수 작가님도 인생 좀 살아보신 분이라니(저보다는 무려 1년이나 더 살아보신 분이라니)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글을 읽었는데, 이게 뭡니까, 대충 살라니요. 따지지 말고, 일단 살라니요, 나중에 다 알게 된다니요. 김연수 작가님, 실망이 큽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39년 동안 너무 대충 살아서 “이름을 DC KIM(대충 김씨)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을 정도였으며,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목도 대충 보는 바람에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대충나무 대충 걸렸네>로 읽어 주위 사람들을 당황케 하기도 했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돈 받고 쓰는 글도 이렇게 대충 쓰고 있지 않습니까. 영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벌써 3매 채웠습니다.
김연수 작가님은 언행일치를 몸소 실천하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충 살라더니, 자신도 대충 살더군요. 고민을 해결해 주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고민남에게 자신의 고민을 상담 받으려 하다니, 정말 돈 받고 쓰는 글을 이렇게 대충 써도 되는 것입니까. 아무튼 저에게 질문하셨으니 저도 답변을 해드리렵니다. 질문은 이랬지요. 세상은 점점 나아지는 것인가? 여긴 조금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답이야 간단합니다. 답은 없습니다. 이것은 질문으로만 존재가 가능한 질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질문이 있지요. 답과 함께 짝패를 이루는 질문이 있는가 하면, 질문으로만 존재가 가능한 질문이 있습니다. 두 번째 종류의 질문은 답을 얻는 순간 질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 제가 너무 진지했지요. 대충 살아야 하는데, 잠깐 딴생각을 하다보니 너무 진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서로의 고민은 각자 알아서 풀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 변두리에서 대충 김씨였습니다.
2. 삶은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혼돈 태어나서 한번도 상담 같은 걸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고민을 열심히 들어준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거의 없다. 고민을 잘 듣지 못하니, 고민 얘기 하기도 미안한 거다. 내 고민 얘길 잘하게 되면 남의 고민도 잘 듣게 되려나. 상담의 중요성은 알고 있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나면 한결 가벼워진다. 그 어떤 초특급 비밀이라도 누군가에게 발설하고 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담이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도 한다. 가끔은 나도 상담 같은 걸 받아볼까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에잇, 그 돈으로 김연수랑 술이나 마시자’ 싶은 마음이 들고 실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다보면 고민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물론 해결되는 게 아니라 뒷전으로 밀리는 거다- 결국 남는 건 두통과 속쓰림뿐이지만 고민 얘기할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본전은 건진 게 아닌가 싶다(라고 위안해야지).
사람들은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 상담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거다. 이거냐 저거냐,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이 사람이냐 저 사람이냐, 갈 거냐 말 거냐, 죽을 거냐 말 거냐. 그래서 사람들은 묻고 또 묻고, 점집에도 가보고, 종교에도 의지하고, 그러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걸까. 더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걸까.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정작 우리가 며칠 밤을 새우며 고민하는 선택의 갈림길들이 훗날 돌이켜보면 별것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선택한 것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 우리가 그 결과를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샘 레이미 감독의 최근작 <드래그 미 투 헬>을 보며 그런 생각이 짙어졌다. 주인공 크리스틴은 정말 별것 아닌 일로 저주를 받고, 삶이 꼬인다. 대출 연장을 신청한 집시 노파의 부탁을 거절하며 모욕을 주었다는 게 이유인데, 내가 보기엔 모욕도 아니다. 단순한 선택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합리적 세계라면 좋은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나쁜 원인에는 나쁜 결과가 따라붙는 단순한 세계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분명하다. 잘 살면 된다. 좋은 원인만 만들면 된다. 하지만 삶이란 일직선도 아니고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것도 아니고 우연과 필연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혼돈일 뿐이다. 우리의 선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난 칼럼에서처럼 다시 묻게 된다. 정말, 솔직히,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역시 김연수 작가의 충고처럼 대충 사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 건가.
나는 <드래그 미 투 헬>이 즐겁지 않았다. <이블 데드> 시리즈를 도대체 몇번이나 보았는지 브루스 캠벨의 표정까지도 기억하며 모든 장면에 열광했던 나인데, 샘 레이미의 귀환은 너무 싱거웠다. 예전에 비해 장난도 덜했고, 까무러치게 웃기는 장면도 적었다. 거장인 건 알겠지만 장르 특유의 쾌감에 좀더 충실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크다. 무엇보다 가장 싱겁고 허무했던 것은 결말이다. 튀어나오는 내장들과 똑, 똑, 으스러지고 부러지는 뼈들과 나부끼는 핏자국에 놀라면서도 배꼽을 붙잡고 낄낄거리며 몇번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엔 뭔가 쑥스럽고, 해피엔딩 비슷한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이야 어쨌든 결과는 해피엔딩이고, 적들이야 어쨌든 우리는 승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웃을 수 있었던 거다. 나도 안다. 현실은 <이블 데드>보다 <드래그 미 투 헬>에 가깝다는 것을. 원인을 훌쩍 뛰어넘는 해피엔딩보다 원인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끔찍한 엔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