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내내 나를 사로잡은 건 마이클 잭슨의 죽음이 아니라 유현목 감독의 죽음이었다. 팝의 제왕의 죽음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영화 <오발탄>을 만든 감독의 삶에 미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예술가의 죽음 뒤에는 보통 그들이 남긴 걸작을 기억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나를 사로잡은 건 그가 살아서 이룰 수 없었던 것들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은 만약 김기영 감독이 스페인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오늘날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거장이 됐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탓에 그의 작품들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질 기회가 없었고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또 김기영 감독이 창의성을 존중하고 그의 비전을 실현할 만한 시스템에서 작업했더라면 그의 영화는 여러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리라.
박찬욱 감독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검열되고 아무것에도 속박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김기영 감독의 영화들을 내 마음속의 눈을 통해 상상해본다. 그러나 똑같은 질문을 유현목 감독에게도 던진다면? 만약 그가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결과를 상상하기 어렵다.
유현목 감독은 김기영 감독처럼 상업화되고 철저히 통제된 60년대 영화산업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당대 영화평론가들이 보낸 찬사에도 나는 그들이 정말로 유현목의 영화세계를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유현목 감독은 평론가들이 그를 “한국 리얼리즘의 아버지”라 치켜세웠던 것을 오히려 족쇄로 여겼던 듯하다. 1999년 부산영화제 유현목 감독 회고전 책자에서 이효인이 지적한 것처럼 그의 복합적인 내러티브와 사운드와 카메라 앵글의 실험적 사용은 유현목이 순수한 사실주의적 미학을 넘어선 그 무엇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대 평론가들은 사실주의적 감독을 원했고,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자마자 그가 바로 그들이 원하는 감독이라고 성급히 결론내린 감이 있다.
유현목의 영화를 보다보면 그의 예술적 감성이 좀더 자연스럽게 발전했다면 벨라 타르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같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영화들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재능이 어느 정도까지 미쳤을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런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음은 비극이다. 60, 70년대 한국에서 그런 영화를 만들기는 불가능했다. 유현목의 걸작 <오발탄>은 1961년 4·19혁명 당시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군사정권은 곧 그 영화를 상영 중지시켰다. 몇년이 지나 그는 (2004년 부천영화제에서 복원상영되었던) <춘몽>이라는 환상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로 외설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그에 더해 그 시대에는 독립제작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유현목 감독은 예술영화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그가 추구하고 싶었던 기술적 측면의 완벽주의에는 무신경했을 소수의 대형 영화 제작사들과 일해야 했다.
이처럼 타협한 상태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는 예술에 자신의 인생과 마음을 다 바친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유현목은 그의 생애 동안 존경받았고 그가 사랑했던 분야에서 일했다. 그는 언제나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숱한 어두운 좌절의 순간들을 겪었으리라. 때로, 천재인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