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5일(현지시각).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영면했다. 필리핀의 한 교도소에서 그를 추모하는 <We are the World>가 울려 퍼지는 동안, 파리 시민들은 거리에서 잭슨을 상징하는 춤 ‘문워크’를 재현했고, 뉴욕 유니온 스퀘어에서는 슬픔에 잠긴 팬들이 ‘마이클! 마이클!’을 외치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서 잭슨을 기리는 추모 퍼레이드가 열렸고, 라디오와 TV에선 잭슨의 노래가 쉴새없이 울려 퍼졌다. 잭슨을 따라 자살하겠다는 팬클럽의 극단적인 소식이 들려왔고, 잭슨의 동상을 백화점 안에 설치한다는 영국 해러즈백화점의 소유주인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발표도 있었다. LA 대형 경기장의 장례식과 추모 공연도 예정돼 있다.
그리고 잭슨이 죽은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그가 세운 음악적인 기록, 사후 그의 유산, 판권과 관련된 모든 것이 돈으로, 숫자로 환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잭슨은 수치로 매길 수 없는 그 이상의 절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의 죽음은 80년대 찬란했던 팝의 역사를,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우린 쇼 비즈니스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7월8일 열릴 마이클 잭슨의 런던 컴백 공연을 앞두고 AEG 라이브의 프로모터 랜드 필립스는 이렇게 전했다. 지난 1997년 가졌던 투어 공연 이후 처음. 그러니까 이번 공연은 마이클 잭슨이 12년 만에 팬들과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였다. “이번이 생애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라는 잭슨의 전언에, 팬들은 앞다투어 공연 티켓을 예약했다. 판매 75만장, 무려 8500만달러에 이르는 수익금이 예정돼 있었다. 오랜만의 컴백 공연에 잭슨은 흥분했고 기자회견을 통해 “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다. 음악적 열정은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는 희망찬 메시지를 전달했다. 물론 ‘네버랜드’에 칩거한 채 두문불출했던 잭슨의 컴백에 모두가 호의적인 건 아니었다. 영국 코미디언 스티브 펀트와 휴 데니스는 <BBC 라디오4>의 <더 나우 쇼>(The Now Show)에서 “1980년대 유명인사가 컴백한다는데 정말 믿기 어렵다”며 “마이클 잭슨이냐 IRA냐?”라며 잭슨을 한물간 아티스트로 비하했다. 게다가 그를 무던히도 쫓아다녔던 외모 관련 유언비어는 그즈음 급기야 코와 피부를 넘어서 ‘잭슨의 귀가 짝짝이다’라는 루머까지 양산해내고 있었다.
억측을 잠재울 이는 다름 아닌 잭슨 자신밖에 없었다. 지금쯤이야말로 전설적인 퍼포먼스로 그가 컴백할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6월25일 오후 2시26분, 가수 잭슨의 명예를 회복해줄 필생의 쇼가 채 시작되기도 전, 그의 사망 소식이 앞서 전해졌다. 사인은 심장마비. 50살의 나이, 가수 생활 40여년 만이었다. 팝의 역사가 시작되는 문을 열어준 제왕 잭슨이 사라졌다. 잭슨이 써내려간 한편의 동화가 나이트메어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개척자,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다
누구나 마이클 잭슨을 안다. 80년대를 지나왔던 사람에게 잭슨은 그들 각자의 기억이 아닌 집단의 기억으로 환원된다. 현란한 고음으로 마무리되는 <빌리진>을 따라 부르고, 달을 유영하는 듯 뒷걸음치는 ‘문워크’를 흉내내는 것은 모두에게 그 시절을 추억하기 위한 도구로 자리한다. 70년대 로큰롤의 시대가 저물고 시작된 새로운 장르, 팝의 역사는 잭슨에 의해 문을 열었으며, 잭슨 없이는 팝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 발전했을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가 행한 모든 업적이 기록으로, 전설로 자리잡는 이른바 신화의 시대가 80년대였다.
“사람들이 주머니에 돈을 너무 많이 넣어줘 바지가 흘러내릴 지경”이라 말할 정도로 당시 잭슨은 엄청난 파급력을 행사한 스타였다. 그가 광고한 펩시가 코카콜라보다 성장했고, 그의 스토리를 다룬 <타임> 판매가 급증했다. MTV의 등장과 함께 그는 ‘보는 음악’으로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재빨리 습득할 줄 아는 타고난 뮤직 비즈니스계의 천재였다. 당시는 비틀스 신화를 전달할 수단이 오로지 몇개의 네트워크와 라디오였던 60, 70년대와도,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원하는 가수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온라인으로 음악을 사거나, 심지어 훔칠 수 있는, 메가 히트 앨범이 사라진 오늘날의 음악 구도와도 질적으로 다른 이른바 ‘순수의 시대’였다.
흰 장갑과 검은 구두에 흰 양말을 신고 중절모를 쓴 채 미끄러지듯 뒤로 가는 잭슨의 춤은 춤을 넘어 퍼포먼스로, 가수를 넘어 하나의 캐릭터로 자리했다. ‘슈퍼스타’를 향한 경배는 충실하고도 열렬했다. 모두가 하나되어 그의 의상을 따라 입고, 한목소리로 노래하고, 같은 동작을 따라했다. 한 앨범(<스릴러>)이 장장 37주간 빌보트 차트 1위에 오른다거나,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한 음반 1위(<스릴러>), 2위(<배드>)가 잭슨 한 사람의 앨범이라는 가공할 만한 기록이 실제 눈앞에 펼쳐졌다. 라이벌로 통했던 프린스를 비롯해 듀란듀란, 아하, 마돈나 등 팝의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뒤를 이어 등장했지만, 그가 세운 기록을 깰 사람은 결국 잭슨 자신밖에 없는 기이한 구조가 생겨났다. 잭슨은 그 풍요의 시대의 기반이자 정점에 자리한 이른바, 대체 불가능한 절대가수였다.
흑·백 음악 사이의 크로스 오버 확립
신화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잭슨 자신이었다. 잭슨이 MTV의 수혜를 얻은 건 맞지만, MTV가 처음부터 그에게 열려 있던 건 아니었다. 로큰롤과 백인음악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 흑인음악은 결코 주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데뷔앨범 <<오프 더 월>>부터 파트너십을 유지한 제작자 퀸시 존스와 함께 잭슨은 펑크와 디스코팝, 솔, 소프트 록을 거리낌없이 결합해 흑인음악이 백인음악과 어우러질 수 있는 크로스오버의 기초를 확립했다. 뉴욕의 백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도, 대만의 황인도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전세계 모든 이들이 그의 노래를 즐겼다. ‘벽을 깨고’, ‘흑백이 상관없는’ 그의 음악을 향한 비난에 대해서 그는 “나는 조금도 두렵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흑인 뮤직비디오는 방송 불가라는 방침 역시 잭슨의 뮤직비디오 <빌리진>으로 깨졌다. 뮤직비디오는 홍보용 도구에 불과하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잭슨은 수백만달러의 제작비와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다. 장장 14분, 35mm 카메라로 촬영한 ‘미니영화’ <스릴러>가 공개된 순간, 지금까지 통용됐던 뮤직비디오의 개념은 유명무실해졌다. 잭슨은 스스로 괴물 분장을 해 얼굴이 망가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촬영에 임했고, 그해 그래미의 영광을 안았다. 뮤직비디오 최초로 집단 댄스를 도입한 <Beat It>은 이후 뮤직비디오의 고전이자 원형으로 자리했으며, 영화 <터미네이터2>에서 쓰였던 몰핑 기법을 뮤직비디오 최초로 <블랙 오어 화이트>에 활용해 흑인, 백인, 동양인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특수효과로 엄청난 충격을 선사하여 MTV 역사상 가장 많이 방송된 뮤직비디오라는 기록을 세웠다.
말론 브랜도의 양복 터는 장면부터 찰리 채플린이 골프 치는 장면까지 200가지가 넘는 영화의 장면들을 적용한 <데인저러스>의 안무 역시 깜짝 놀랄 선물이었다. 잭슨의 공연은 항상 새로운 시도들로 가득했다. ‘보는 음악’의 원칙은 공연에도 일관되게 적용됐다. 그가 무대 아래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토스터 기술’로 깜짝 등장했던 오프닝은 잭슨을 기억할 명장면으로 남았다. 투어 공연 때 처음으로 뮤지컬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메이저 가수로서 아시아 주요 국가에서 투어 공연을 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새로운 장비에 대한 저항도 적었다. 돌비 사운드가 미처 상용화되기 전 장비를 집으로 끌어들여와 사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잭슨은 이후 자신에게 붙여진 ‘괴짜 재코’(Wacko Jacko)라는 말을 싫어했다지만, 무모한 도전이라는 점에서만큼은 ‘괴짜’라는 표현이 용서되지 않을까 싶다.
도전의 원칙은 간결했다. 잭슨은 아티스트로서의 자의식에 안주하거나 멋진 모습으로 남는 데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뮤직 비즈니스계에 선사할 새로움을 찾기 위해 매분 매초 고군분투하는 진정한 팝 아티스트였다. “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 <빌리지 보이스>의 평가대로 노력하는 천재로 인해 대중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루머와 추문으로 얼룩진 마지막 나날들
80년대를 풍미했던 잭슨의 시대는 지속되지 않았다. 잭슨의 비서는 “그 누구도 잭슨보다 더 높이 솟구쳤다 깊게 가라앉은 사람은 없었다”며 그의 부침을 설명했다. 1979년 <<오프 더 월>>로 싱어송라이터로 두각을 나타낸 이후 30년 동안 그가 발표한 앨범은 단 5장에 불과했다. 재기를 위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잭슨의 영광도 서서히 잠식되고 있었다. 마스크를 한 잭슨은 요지부동이었다. “만약 세상에 어린이들이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며 잭슨은 어린이들의 낙원 ‘네버랜드’를 유지하는 데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음악활동에서 온 수익은 모두 동물원과 놀이동산이 있는 1천만m2의 네버랜드를 위한 유지비에 쓰였다. 그러나 끔찍한 어린이 사랑은 소아기호증이라는 추문으로 변질됐고, 각종 소송은 네버랜드를 악몽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잭슨의 음악에 바쳐졌던 평가들은 광고 촬영 당시 입은 두피 화상 때문에 진통제를 투여해야 한다거나, 공연 때 다친 코뼈의 재수술로 코가 내려앉는다거나, 슈퍼 박테리아로 피부가 하얗게 변한다는 루머로 대체되었다. <Heal the World> <Earth song> 같은 ‘세상을 구원하자’는 바람과 진심의 언어는 추문과 뒤섞여 곡해되었다. 더이상 음악적 시도라는 자장 안에서 평가받지 못하는 불운한 가수를 향한 대중의 시선은 냉담했다.
2006년 월드뮤직어워드 공연 중 어린이들에 둘러싸인 마이클 잭슨.
아동 성추행 혐의로 법원을 찾은 2005년의 마이클 잭슨.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형제들과 함께 구성한 그룹 잭슨 파이브의 음악이 모두 넘버 원 차트에 올랐던 때, 여성스러운 고음과 무대 매너로 그 중심에 섰던 잭슨은 고작 다섯살 나이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어린 잭슨이 솔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의 춤과 음악을 그대로 흉내낸 천재 가수로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그는 끊임없는 연습과 녹음으로 점철된 하루가 아닌, 연습실 밖 창 너머로 보이는 또래 아이들처럼 뛰놀고 싶은 욕망을 가진 소년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퀸시 존스가 한 “잭슨이 받은 대중의 관심과 언론의 집중적인 공격 앞에서 옆집의 누군가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잭슨은 선택하기도 전 이미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가혹하게 그를 내몰았던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어린 시절에 생긴 구멍으로 결국 그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대신 피터팬으로 남게 됐다. <E.T.>의 사운드트랙 작업으로 잭슨을 만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어른이지만 아이의 심성을 가진 그를 두고 ‘불타는 숲 속에 있는 새끼사슴’ 같았다고 전했다. 불구덩이 속에서 어린 사슴을 구하지 못한 죄, 팝의 디바 마돈나의 말처럼 “세계는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를 잃었다”. 그렇지만 폴 매카트니가 기억하는 ‘뛰어난 재능과 부드러운 심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음악이라는 영속의 언어를 우리 곁에 남겨주고 갔다. 잭슨을 향한 상환할 수 없는 부채가 오롯이 대중에 떠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