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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디테일이야
김연수(작가) 2009-07-16

<걸어도 걸어도>를 보고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고민하는 친구에게

<걸어도 걸어도>를 다 보고 나서 한없이 쓸쓸해져서 ‘정말,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라고 생각하게 된 일산 변두리 거주 고민남(39)에게.

1. 먼저 고민남의 절절한 심정에 감정이입하기 위해서 김범수의 <슬픔활용법>이라는 노래를 틀었습니다. 오늘은 장마가 시작된 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지금 떨어진 그 빗방울부터 장마가 시작되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은 아니니 역시(일본영화를 보고 나면 아무튼 이 말만 입에 붙는다니까요) 그 사흘째라는 건 제쪽의 일방적인 판단입니다(미안합니다만, 잠시 커피를 가져오겠습니다). 분위기 좋습니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한번 노래에 귀를 기울입니다. 소박한 의문 하나가 떠오르네요. 왜 이 남자는 슬픔까지 활용할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설마 하나뿐인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하지만 폐품 지경이 되어 재활용해야 할 건 지구가 아니라 노래 속의 남자군요. “너 때문에 못 쓰게 된 나”라고 절규하니까요. 여자 앞에서 까불다가 어디 뼈라도 분질러진 것일까요? 도대체 이 남자, 왜 못 쓰게 됐을까요? 어쨌든 오늘은 장마가 시작된 지 사흘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 하늘 아래 어딘가에 뼈라도 분질러졌는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지도 못하고, 슬픔을 활용해서 그녀를 눈앞으로 데려오는 정신승리법을 연마하는 폐품 남자가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구름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울고 웃는 사이에 세상은 다시 여름입니다. 봄에 죽은 누군가에게 이 여름은 그의 인생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런 여름입니다. 만든 지 사흘 정도가 된, 완전히 새로운 여름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당연합니다. 이런 여름, 정말, 솔직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대충남이 고민남에게 답합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따지지 말고, 대충 살아요

조언하자면 그냥 대충 살아요. 따지지 말고. 괜히 싫은 사람 찾아가서 싫다고 소리 지르지 말고, 상처 주는 인간들 앞에서 상처 헤집어 보여주지 말고.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마음에 든다면 마음껏 부를 것 같지만, 그게 또 그렇지 않습디다. 대충대충, 부르게 됩디다. 지금 저는 김범수의 노래를 벌써 여섯 번째 듣고 있습니다. “너 때문에 못 쓰게 된 나라고”라며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를 지경이군요. 이 여름도 그렇게 몇번을 반복재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세 번째 재생될 때쯤이면 우린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면 되는지. 하지만 인생이 재활용되는 거 본 적 있습니까? 우리 앞의 인생은 늘, 언제나, 만든 지 사흘 정도가 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니까 다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우왕좌왕 좌충우돌의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본디 이기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민남(39, 일산 변두리 거주)의 솔직한 고백처럼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싫으면 싫다고 소리 지르고, 상처를 받으면 꼭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기적이라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할지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니 올바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인생에 대해서 아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어쩔 수 없이 이기적입니다. 싫다고 소리칠 때조차 우리는 그게 과연 싫은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김범수가 고민남에게 답합니다.) “너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너 때문에 못 쓰게 된 나라고, 바보처럼 너를 미워할 핑계를 찾곤 했”던 시절이 다들 있었겠지만, 그렇게 말할 때조차도 우리는 그녀를 정말 미워하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따지지 말고, 일단 살아요. 나중에 다 알게 될 거니까.

2. 분명히, 여기까지 읽고도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모를 것 같아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걸어도 걸어도>를 보러 갔습니다. 빌어먹을 변신로봇들이 동네 상영관을 모두 점거하는 바람에 서울까지 가야만 했던 것인데, 고민남은 그 외진 동네에서 어떻게 이 영화를 보려고 마음먹었는지 궁금하더군요. 영화를 보다가 고민남이 말한 문제의 장면, 그러니까 할머니가 추억의 노래라면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를 때, 저도 모르게 “마찌노 앙가리가 도떼모 끼레이네, 요코하마 부르 라이또 요코하마”라면서 흥얼거리게 되더군요.

그건 우리 어머니가 유일하게 남들 앞에서 불렀던 노래였기 때문이지요. 그때가 우리 어머니 45살 때의 일입니다. 나중에 어머니 칠순 잔치에 저는 직지사 관광호텔 뷔페 무대에 올라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건 어머니에게 배운 유일한 노래입니다”라고 제가 그 곡을 소개했지요.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리고 흔들려 당신의 품속.” 그 노래를 부르는데 제가 처음 그 노래를 들었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젊었는지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다음에 그 노래를 들을 때, 저는, 그리고 어머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그처럼 유쾌하고 즐거운 영화에서 듣게 된 것입니다. 2009년의 여름은 김범수의 노래로 기억될까 싶었는데, 역시 <걸어도 걸어도>로 떠올리게 되겠군요.

엄마 칠순잔치에서 부른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이번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저 역시 고민남처럼 거대한 질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과연 점점 나아지는 것인가? 여긴 조금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고민남이 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걸어도 걸어도>를 보면서 잠시 그런 질문 같은 건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백일홍과 노란 나비와 수건 위에 놓인 세 자루의 칫솔과 뒤늦게 산 RV와 타일이 떨어져나간 목욕탕과 늙은 참치집 주인이 자꾸만 내놓는다는 참치 뱃살 같은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섬세한 디테일들은 우리 인생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사랑했던 시절들이 어떻게 사물에 달라붙는지, 그리고 나중에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사랑을 다시 환기시키는지 잘 보여줍니다.

누군가가 어떻게 살면 좋겠느냐고 물을 때마다 대충 대답합니다만, 몇년에 한번 우연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들을 때마다 저는 잘사는 방법이 뭔지 알 것만 같습니다. 사물에 담긴 추억으로 우리는 같은 인생을 여러 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로써 디테일이 왜 영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그토록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일들이 이런 식으로 재활용되는 것이라면 (딱히 고민남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폐품 인생한테도 구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너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욕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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