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는 봤는데 판사는 못 봤다. 한국영화엔 가끔 검사 캐릭터가 등장한다. 대부분 꼴통처럼 나온다. <넘버.3>의 마동팔 검사(최민식), <공공의 적2>의 강철중 검사(설경구) 모두 그렇다. 평범하고 점잖은 검사는 없다. 그럼 판사는 어떠한가. 한국영화에서 아직 만난 적은 없지만,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늘 신중하고 냉정한 모습? 고지식하고 권위적인 꼰대? 공정판결의 사명감으로 불타는 청백리?
최근 발간된 <부러진 화살>이라는 르포집을 읽었다. 어느 수학자와 판사집단간의 싸움을 다룬 책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떠오른 생각은 ‘정통 사회물 영화에 딱 좋은 소재’라는 것이었다. 책 속의 판사들이 영화에 등장하면 뜻있는 일이겠다 싶었다. 혹시 법정영화에 관심을 지닌 제작자나 감독, 시나리오작가가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책의 주인공은 성균관대 수학과 김명호 전 교수다. 그는 눈치없이 바른말을 하다 1996년 학교에서 쫓겨났다. 복직을 위해 소송을 벌였지만 줄기차게 패소했고, 결국 항소심 부장판사 집을 찾아가 석궁으로 위협하는 ‘몹쓸 짓’을 하기에 이른다. 지은이 서형은 이 ‘석궁사건’의 법정 풍경을 다큐멘터리처럼 세밀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한편의 코미디이자 동시에 호러였다. 판사들마다 방청객들의 조롱을 받으며 사리에 맞지 않게 재판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코미디였고, 판사들의 카르텔이 어떻게 한 인간을 무시무시한 수렁 속으로 밀어넣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호러였다. 재판부는 김명호 전 교수에게 실형 4년을 선고했지만, 과학적 증거와 증인신청은 철저히 무시했다. 미스터리하게도, 피해자인 부장판사의 배에 맞았다는 ‘부러진 화살’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김명호 전 교수가 처한 상황은 일본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가네코 텟페이(가세 료)의 그것과 유사하다. 전철에서 치한으로 몰린 텟페이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음에도 구속된다. 그의 변호인단은 객관적인 현장 분석자료와 증인을 확보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판부는 끝내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법정공방을 흥미진진하고 리얼하게 보여준 이 영화는 일본 사법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친 전율할 만한 명작이었다. 특히 방청객들에게 상반된 반응을 보이던 두명의 판사 캐릭터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부러진 화살>의 지은이는 “한국에서 가장 위선적인 집단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법률가집단이라고 하겠다”고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대한민국 판사들을 스크린에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