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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그 무력함의 공포

한국사회의 젠더와 계급, 국가의 문제를 치열하게 얽은 <마더>

신화적 공포가 있다. 어머니가 생명을 주었으니 그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으리라는 두려움. 남성적 불안의 원초적 예다. 이빨 달린 여성 성기가 그 이미지 중 하나다. 그런가 하면 파마콘(pharmakon)이 있다. 파마콘은 상반된 의미인 독약과 약을 동시에 의미한다. 파마콘의 치료적 측면은 독약의 면모가 드러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다. 파마콘이 약이 되는 것은 또 다른 측면인 독이 배제될 때이다. 치료로서의 파마콘은 독약과 약의 차이가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더(mother)와 머더(murder)의 차이. 약재를 다듬는 마더와 머더(살인)를 하는 마더, 엄마와 어머니의 변주.

마더와 머더라는 원초경

영화는 들판에서 춤추는 여자(김혜자) 위에 ‘마더’라는 자막을 띄운다. 이 지면, 전영객잔에 정한석과 허문영이 장고 끝 장문의 평문을 실었기 때문에 나는 짧게 몇 가지 점만 운을 띄우려 한다. 나는 예컨대 마더의 욕망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그녀의 필요는 무엇일까? 부족함 혹은 넘쳐나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춤을 추고 마지막에도 춤을 춘다. 처음에는 들판에서 혼자 추고 나중에는 아주머니들에 섞여 춘다.

이 춤에 리듬을 주는 이병우의 음악은 코멘트를 한다. 메타 영화음악. 분위기와 정조를 극대화하며 이야기에 끌려가는 앰비언스 음악이 아니라 아이러니와 비애, 희극성을 표현한다. 혹은 어떤 자의 헛다리짚음을 엇비슷하게 또 엇나가며 표현한다. 그래서 마더가 영화의 앞과 뒤에서 춤을 출 때 우리는 그녀의 춤을 보지만 다중 의식을 갖게 된다.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아줌마의 막춤이 악기 기타의 메타 코멘터리를 받는가? 당연하게도 나는 이 메타적 지시와 엄마와 어머니에서 마더와 머더로의 이행이 독약과 약이라는 파마콘적 이중적 배열이며 생명과 죽음의 짜임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붙여놓고 보면 이 짜임 속에서 마더의 드러난 욕망은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춤추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마음속에 맺힌 것을 풀어야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침을 놓는다. 허벅지 위 놀란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는 침 자리를 그녀는 아들 도준(원빈)에게 또 고물상 노인에게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막상 이 침술을 시행하는 곳은 그녀의 몸이다. 자신의 몸 안에 그 비결 침, 바늘을 삽입한다. 통속 열녀전은 과부가 성욕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바늘로 찔렀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허문영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마더>에선 자위이자 자학의 행위이며 치유이자 망각이며 성욕이자 금욕의 자리다. 광기가 이 행위들과 자리를 넘나든다.

이 예시는 영화에서 다른 예시와 거울 구조를 이룬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 그러니까 도준이 다섯살 때 농약이 든 박카스를 도준에게 내민 적이 있다. 영화는 플래시처럼 짧게 그리고 설명없이 다섯살 도준이 박카스 병을 바라보는 제시한다. 이 장면은 너무나 순식간이어서 나중에 힘들게 복기를 해야 의미와 만나는 장면이다. 영화의 구조는 과거의 이러한 접힌 부분을 플래시, 보여주지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플래시가 영화의 깊은 죄의식과 닿아 있다. 마더와 머더로서의 엄마는 도준이 다섯살부터 시작된 패턴이며, 엄마는 이 사건 이후 도준에게 독약이 아닌 양약만을 먹인다(먹였다라고 진술한다). 영화는 어찌 보면 마더가 도준이 살인자임을 발견하면서 그리고 그에 대한 증인을 죽여 마더가 도준을 구해내면서 일어나는 악마적 구원의 순간이라는 도착적 구제의 과정을 다룬다. 즉 아들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맞이하는 순간이 그녀에겐 지옥이자 구원이다. 아들과 마더의 연결고리는 여기서 다시 탯줄처럼 맺어진다. 도준이 살인 현장에서 발견한 그녀의 타버린 침술 도구가 다시 그녀에게 건네지고 이들의 침묵의 연대는 결코 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녀는 통탄할 경로를 통해 원하던 것을 얻는다. 그것은 삶의 생기나 숭고함과는 관계없는 심연 같은 연대, 성장하지 못하는 아들과 성숙하지 못하는 엄마의 원초적 결합이다. 탯줄 관계의 회복, 그 욕망 충족 끝에 놓인 또 다른 심연, 터널, 블랙홀이다. 이것이 유년의 첫 장면, 원초경이다. 원초경은 위험과 유혹과 충족과 결핍이 경계없이 왕래하는 곳이다. 상징과 실재의 침범을 두려워하는 장소이나 경계이며 거울인 그곳. 언어화할 수 없는 이 도착, 이중적(독약과 양약)인 마더의 심리는 그로테스크한 춤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이 마지막 춤을 추기 전 영화의 대사건은 물론 살인사건이다. 처음 영화는 마더의 시선을 따라간다. 지역 약재상에 고용된 그녀는 한약재를 썰고 있다. 건재는 칼에 싹둑싹둑 잘린다. 아들 도준이 길 건너편에서 개를 데리고 장난치고 있다. 차가 지나간다. 마더의 시선으로 교통사고가 목격된다. 마더의 충격과는 달리 아들에겐 경미한 사고다. 이후 도준의 시선이 중요하다. 그의 시선으로 목격되는 한 소녀. 우리는 그의 시선으로 그 소녀가 골목, 어둠으로 사라진 뒤 내던져진 큰 돌멩이를 본다. 다음날 우리(관객)는 옥상 위 머리를 떨어트린 채 죽은 소녀를 본다.

옥상 위 난간에 ‘전시’된 소녀의 주검

마더가 독약과 양약, 신화적 공포와 돌봄의 변주, 대구라고 한다면 옥상 위 난간에 ‘전시’된 듯 긴 머리를 떨구고 죽어 있는 소녀 아정은 <살인의 추억>에서 축축한 배수로에 잠겨 있던 여자들의 시체와 대구를 이룬다. 난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그 배수로에 버려진 여자들이 모두 일어나 복수를 하는 공포영화라는 장르를 미친 듯이 원한 적이 있다. 스릴러 대신 호러를 말이다. 이제 소녀는 배수로 대신 옥상 위에 방기된다. 섬뜩하다. 소름이 끼친다. 그녀는 목 관절이 분리된 사다코 같은 공포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영화에서 두번 이 사태에 대한 질문이 나온다. 진태(진구)가 엄마에게 묻는다. 보통 시체를 파묻는데 왜 동네 사람들이 다 보라는 듯이 옥상 위에 전시했을까? 그는 아정의 남자 관계를 들먹이고 치정 살인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성적 방종에 대한 공개적 처형 방식에 해당하는 전시라는 것이다.

도준은 엄마에게 문뜩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피를 흘리고 있으니까 빨리 병원에 데려가라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데 가져다두었을 것이라고. 도준의 섬망에 가까운 망각을 고려한다면 믿을 만한 진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이유도 없다. 여기에 소녀를 보는 서로 연결된 두 가지 시각이 있다. 성적 대상으로 보는 전형적 입장, 그리고 피 흘리는 상처로 보는 입장이 그것이다. 피 흘리는 상처란 여성 성기를 남성 성기가 거세된 형상이라고 그 차이를 투사, 상상하는 남성적 불안의 형상화 작업이다. <마더>에선 예컨대 어떤 전도. 자신 행위의 결과로서의 상처를 부인하는 과정이다.

도준은 명백히 가해자이고 생존자다. 아정은 희생자며 주검이다. 마더가 도준을 돌보는 반면 아정은 치매 걸린 할머니의 보호자다. 소녀가장이다. 소녀가장은 할머니의 쌀독에 쌀을 마련하기 위해 성매매를 한다.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 소녀가 처한 현실이다. 마더가 독약과 양약의 한약재를 가진 모성이라면 아정에겐 사회적 도구가 없다. 휴대폰에 찍힌 성매매 대상 남성들의 사진이 자신에게 어떤 쓰임새가 있을까 생각하는 정도다.

법적 장치가 정의롭지 못한 시대에…

마더가 다른 경로를 통해 이야기하게 되는 “넌 부모가 안 계시니? 엄마가 없니?”라는 진술은 경찰이나 법이 사회적 방어막이 되어주기 어려운 시대, 거의 유일한 보호 장치로서의 모성이 도준의 경우를 통해 부각되면서 아정의 경우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법적 장치가 정의롭지 못한 시대, 부모나 엄마가 없는 미성년자들이 사회적 소수자로서 죽고 감옥에 억울하게 갇힌다. <살인의 추억>의 음습한 배수로에 묻히는 대신 <마더>의 소녀는 백주에 옥상에 올려져 있고 공포영화 여귀의 형상으로 죽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볼 수 있지만 범인은 행위 자체를 인지 못하며 오인하고 있다. 진범은 풀려나고 다운증후군을 앓는 듯한 친구 종팔은 감옥에 갇힌다. 이 많은 억울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정한석은 국가의 무능 속에서의 인정투쟁의 공허함, 무력화를 한탄한다. 그 무력함의 공포를 지적한다.

이렇게 한국사회의 젠더와 계급, 국가의 문제를 치열하게 얽히게 한 영화 <마더>, 적절한 로케이션, 클로즈업 등의 농밀한 과장, 이 모든 것을 대담하게 활용하는 촬영 등, 난 이 영화의 미학적 성취와 정치적 긴장과 봉쇄를 보여주면서 그것을 관통하려는 (하지만 넘어섬의 불가능을 시사하는) 사유를 고맙게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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