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밟는 런던보다 3개월 만에 밟는 홍대가 더 낯설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다. 있던 식당이 없어지고, 자주 가던 카페 주인이 바뀌고, 단골 약속 장소던 편의점은 공사 중이다. 유흥가뿐 아니라 집 근처도 마찬가지다. 식당 하나가 아니라 건물 하나 단위로 부서지고 짓기를 반복한다. 동네 중국집은 무료 탕수육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쿠폰을 모으기도 전에 문을 닫고 새 집이 들어서기가 예사.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을 읽다가 침을 삼킨 건 밤마다 등장하는 맛있어 보이는 메뉴 때문이 아니었다. 단골 많은 그 식당이 탐나서였다. 심야식당은 밤 12시에 문을 여는 동네 식당이다. 주인 겸 주방장인 마스터는 재료가 있는 한 손님이 해달라는 어떤 음식이건 해준다. 마스터가 먹으려고 해두었던 어제의 카레가 손님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도 하고, 샌드위치를 원하는 손님이 빵을 사와 마스터에게 내밀며 주문을 하기도 한다. 밤에만 여는 식당이니 손님들도 예사롭지 않다. 동네 건달, 게이 바 주인, 스트리퍼…. 그들은 이곳에서 안면을 트고 우정을 나누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고, 그냥 침묵을 나누기도 한다. 범상한 음식에 얽힌 옛이야기가 이 책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만화의 최고 장점은 음식에 대한 신화를 과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심야 식당이 진짜 동네 단골집 같아지는 건 그 대목이다. 평범하지만 성의있는 맛. 거짓말 같은 수사를 동원한 천상의 맛을 간접경험하게 만드는 게 아베 야로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식을 매개로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밤의 동네 식당과 그곳의 단골손님들이 주인공.
<심야식당>을 보면서 지금은 망해버린 수많은 옛 단골집들이 떠올랐다. 대학 때 아지트였던, 좋은 음악을 틀던 그 술집들. 헤비메탈만 틀던 집도 있었고, 60년대 록만 틀던 집도 있었다. 레코드 가게들은 또 어땠나. 저작권 개념이 희박하던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동네 단골 레코드집 아저씨는 새로 나온 음반 중 베스트만 골라 녹음한 테이프를 2500원에 팔았다. 그때 받아들인 음악의 지도가 지금까지의 내 취향을 좌우한다. 봉주르, 메르시, 베르사이유 같은 이름의 동네 경양식집과 커피숍들도 있다. 돈가스 먹으러 갔다가 과외 선생님의 키스장면을 목격했던(요즘 애들은 모르겠지만 자고로 경양식집 하면 칸막이가 높게 마련이었다), 혹은 밥을 먹고 있으면 꼭 아는 사람이 한둘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게 마련이던(사실 동네에 쿨한 곳은 한손에 꼽을 정도였음). 그런 단골 많은 집에서는 주인이나 손님이나 뻔뻔해지게 마련이라, 주인이 가게를 단골에게 맡기고 조퇴해버리거나 단골이 먹고 싶은 걸 주방에 들어가 직접 만들어먹기도 했다. 그런 집에는 혼자 오는 손님도 많았다. 주인이 눈치를 주기는커녕 같이 놀아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일날은 조금 늦게까지 영업을 해주고(케이크를 나눠먹는 건 당연지사), 좋아하는 CD나 책을 가게에 가져다주고, 메뉴 개발에 같이 머리를 싸매고, 시시껄렁한 근황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나누고…, 당연히 단골 가게의 단골손님끼리 친구가 되는 일도 허다했다.
생각해보면 추억의 묘비명을 세우는 게 꼭 단골 가게만은 아닐 것이다. 골목들이 통째로 사라지고 있으니까. 무작정 걷던 골목, 토하던 골목, 손잡던 골목, 또 토하던 골목, 울던 골목, 키스하던 골목, 싸우던 골목, 마지막으로 토하던 골목….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었던 학교 근처, 집 근처의 뒷골목들은 싸그리 번듯한 주택가로 재정비되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깨달았다. 나, 그냥 나이들었을 뿐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