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원을 보면 언제나 이 말이 떠올랐다. 과유불급. 그의 연기가 과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처했던 억울한 딜레마에 관한 것이다. 비주얼도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 그래서 지나치게 튀는 외모가 빚어낸 개고생 커리어에 관한 이야기다.
<시티홀>에 열광하는 이유의 반 정도는 차승원 때문이다. 드라마 속 그를 보면 감탄하기보다 ‘이제 제 자리를 찾아왔구나’라는 기분이 든다. 키 크고 잘생기고 웃기고 돈 많고 전도양양하고 연애까지 잘하는 남자라니, 그건 누가 봐도 차승원이 해야 할 캐릭터인데 왜 데뷔 10여년 만에야 겨우 이 자리에 왔냐 이거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중반까지 외모와의 싸움으로 점철돼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초창기, 그러니까 인기 모델을 영화에 한번 써먹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작품들에서 그는 외모 때문에 ‘남용’돼왔기 때문이다. 싸구려 바람둥이 같은 식으로 말이다. 물론 주책임자는 불성실한 감독이나 캐스팅 디렉터겠지만 차승원이 이런 남용의 빌미를 준 건 사실이다. 지나치게 큰 키와 팔다리, 숯검댕이 눈썹부터 날카로운 턱선과 수염까지 부담 백배의 강렬한 인상. 누가 그의 인상에서 <밀양>의 송강호나 <너는 내 운명>의 황정민을 연결시킬 수 있겠나. 잘생긴 게 죄냐? 묻는다면 그 시절의 차승원에게는 ‘예스’였던 것이다.
그때 차승원이 던진 카드가 아저씨 되기였다. 잘생기든 말든 외모 따위 신경도 안 쓰이는 시골 아저씨, 또는 무식한 아저씨. 영특한 선택이었다. 도발적일 만큼 강한 외모의 청년은 위험하고 불안하며 때로는 불경스럽다. 하지만 아저씨가 되면 그 외모가 주는 위험성은 한층 누그러든다. 하물며 시골 아저씨, 무식한 아저씨라면야.
하지만 남자의 외모에 언제나 날카로운 촉각을 세우는 나처럼 예민한 여성 관객은 언제나 2% 부족했다. 아~ 저 기럭지에서 왜 우리는 엉덩이로 젓가락 부러뜨리는 것만 봐야 하느냐 말이다. 물론 이런 관객의 바람을 접수했는지 나중에 간지 검사와 간지 지능범을 연기하며 본연의 슈트발을 회복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걸 몰라서 그러는가. 그의 기럭지와 얼굴과 스타일이 충분하게 활용되는 로맨스영화- <국경의 남쪽>은 비주얼 억압멜로였잖아- 를 보고 싶단 말이다.
올해로 마흔. 청년기 수컷의 촌스러운 도발성은 청바지 물빠지듯 빠져나가고 느끼함은 여유로 양질전환되는 나이다. 물론 이 와중에 그의 외모는 아직 경쟁력 넘친다. 이때 여성 관객을 배려해주는 매력적인 로맨스- 로맨틱코미디라도, 하지만 살짝 노출 꼭 부탁- 하나 찍어주길. 이 세월도 얼마 안 남았다. 결단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