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배우 고 박광정이 첫 주연을 맡았던 영화가 있다. 2007년에 개봉한 김태식 감독의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라는 작품이다. 박광정은 극중에서 바람난 아내와 그 애인에 분기탱천하는 도장가게 주인으로 나온다. 영화가 시작되고 오프닝 타이틀이 오르기 전까지, 카메라는 조각칼로 도장파기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을 클로즈업해 꽤 길게 보여준다. 작업을 마친 뒤 도장을 잉크에 묻혀 종이 위에 쾅 찍어내는 박광정. 마침내 도장에 새겼던 글자가 스크린에 공개되는데, 그건 사람 이름이 아니다. 뜻밖에도 분노의 심경이 담긴 딱 두 글자다. 민망해서 이 지면엔 옮기지 못하겠다. 단지,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민중언어이자 아주 소박한 육두문자라는 것(궁금하면 영화에서 확인하시라).
실제 도장가게를 찾아가 그런 글자를 파달라면 미친놈 취급당하기 십상이리라. 그럼에도 하나 파서 성질 뻗칠 때마다 찍어주면 스트레스가 풀릴지도 모르겠다. ‘길티플레저’로 하나 키워볼까? 여기까지 썼는데, 인터넷에 웃기는 뉴스가 하나 떴다. 원주 시정 홍보지의 만평 속에 MB에 대한 욕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들어가 난리가 났다는 거다. 욕에 목마른 시대이긴 한 모양이다.
그래도 욕을 하는 건 ‘옳지 않다’. 품위없다, 감정적이다, 천박하다 따위의 공격이 돌아온다. 그러니 뭔가 끓어오르더라도 꾹 참고 점잖게 말해야 거부감을 덜 산다. ‘시국 욕’을 퍼붓지 않고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건 그래서다. “국민을 다스리겠다는 권력의 오만한 자세가 너무나 역겹지만 우리도 방조와 무관심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책임을 나누며 이 땅의 주인으로서 당연한 권리로 반성의 기회를 주려 합니다.…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겸허하고 진정한 사과를 요구합니다.… 지금의 우리가 훗날 우리에게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게으르지 않았음을 말할 때 떳떳할 수 있기를 약속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는, 그 증거일 것입니다.”(6월16일에 발표된 영화인 225명의 시국선언)
요즘 <씨네21>이 정치적인 기사를 많이 쓰는 듯해, 잡지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무겁다. 이번호에선 문화계와 영화계 내의 어떤 정치투쟁까지 특집으로 전하게 됐다. 어느 조직에나 분쟁이 있고 세력싸움이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사에 동반되는 일종의 ‘게임’이기도 하다. 한데 이건 왠지 ‘사냥’처럼 보인다. ‘코드인사’가 불가피하다 인정해도, 자리를 빼앗는 방식이 너무 노골적이고 치사해 욕이 치민다. 얼마 전 한예종 전문사 과정을 마친 한 후배는 식사자리에서 이렇게 극언을 쏟아냈다. “양아치들이 예술가들을 쫓아내고 있다.” 심지어는 부산영화제까지 ‘좌파색출’의 그림자가 드리운 형국이다. 신사적인 시국선언으로는 모자란다는 판단이 나온다면… 거리로 나가야 할까, 아님 욕설을 담은 도장이라도 파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