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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인정받지 못한 자들의 투쟁 [1]

<마더>가 사회의 병적 히스테리를 드러내는 방식

*스포일러 많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는 안되는 것을 말하며 시작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2009년 5월23일 토요일 아침 10시경에 아직 그의 죽음에 관해 추측성 보도가 더 많을 때 뉴스 채널을 번갈아 보던 그 시각의 나는, 그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말하고 나서 곧장 투신했다는 보도(MBC였던 것 같다)와 “저기 사람이 지나가는데 누군지 알아보라”고 해서 경호관이 확인하러 간 사이에 투신했다는 보도(SBS였던 것 같다)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차이는 보도자의 잘못이 아니었음이 드러났고 그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30여분간 절벽에 혼자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날의 그의 일과 결정에 관해 혹은 그 순간에 관해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잘 알지 못한다. 의아하게도 바로 그날 아침 나는 내가 이 지면에 <마더>를 쓰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실은 잘 모르겠다고 여겼고 그래서 더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어떤 실재의 급습이 찬송이 넘치는 기적으로 오지 않고 검은 피의 애도로 왔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마더>는 거기에 어떤 연관의 사유를 준다. <마더>의 그런 점을 말해보고자 한다.

실체는 블랙홀의 연장에 있다

역사의 블랙홀을 비범하게 다룬 두명의 한국 감독이 있다. 한명은 임상수이고 나머지가 봉준호다. 임상수는 <그때 그사람들>에서 1979년 10월26일에 있었던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풍자의 힘으로 뛰어들었고 결과적으로 뛰어난 정치적 캐리커처를 그려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처음 보았을 때 단지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임상수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가 집요하게 캐냈을 정보수집의 노력과 무관하게 그가 진실을 다 알고 <그때 그사람들>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날의 일은 늘 말해져왔고 잊혀지지 않는 역사가 되었다. 임상수는 결국 미궁에 대한 추론을 내놓은 것인데 그건 의문만 낳고 실체는 알 수 없는 블랙홀의 진실을 훌륭하게 일깨우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불운하게도 이 영화와 관련된 또 하나의 블랙홀은 마지막 영화에 놓인 기록화면 장면을 암전으로 처리해야 하면서 시각화됐다. 그것 자체로는 표현에 대한 탄압이며 불운한 일이었지만, 내용 안에 억지로 블랙홀을 만들라는 그런 법적 판명을 받음으로써 임상수가 이 영화를 통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역사의 블랙홀을 다루었는지 법정은 역으로 우리에게 추인케 해주었다.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에서 1980년대 대한민국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루었는데 그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 그전에 <플란다스의 개>에서 사라진 강아지를 찾으러 다니는 나른한 경리 직원 현남(배두나)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봉준호가 블랙홀을 그저 탐문 구조의 힘을 빌리기 위한 수단으로만 쓴다고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것은 점점 기묘하고 거대해졌다. <살인의 추억>의 미해결 사건은 영화에서 가상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영화는 그렇게 하려면 할 수 있는 매체다. 상상과 환상이 가능한 그것에의 쾌감을 거부할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봉준호는 임상수처럼 풍자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주의 환기를 불러왔다.

소녀가 잔인하게 살해되던 그 와중에 대통령의 행렬이 지나가고 폭력을 휘두르던 군홧발의 경찰은 다리에 못이 박혀 한쪽 다리를 내놓고 그리고 세월은 흘러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눈이 내린 머리칼로 문득 그 살인의 추억이 묻은 그때 그 자리 논두렁의 수로 즉 블랙홀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는 그때 빗속에서 용의자(박해일)를 심문하던 그리고 그 용의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거대한 검은 굴 혹은 터널을 같이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박두만의 시선이 화면 바깥 우리를 향해 정면으로 응시한다. 봉준호는 지나간 것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매우 직접적인 영화의 수사학으로 건네는 것이었으며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때 박두만의 시선이 알려주는 것에 따라 ‘그렇다면 화성의 살인마가 지금 내 옆에 앉아 영화를 볼 수도 있는 거구나’라는, 인정하기 싫은 오싹한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역사는 꺼지지 않았고 블랙홀은 그렇게 연장된다.

<괴물>은 단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 힘들 만큼 더 복잡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바이러스가 만연해 있는 서울, 미군의 독극물 방류로 오염된 한강에 괴생명체까지 생겨나고, 한강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하층민 계급 홀아비의 딸이 괴물에게 납치되면서 별볼일 없던 가족이 소영웅의 집단으로 거듭나고, 결국 다른 아이는 구했지만 딸은 구하지 못한 마지막 장면의 그 어느 눈 내리는 겨울밤에 바깥의 의심스러운 소리에 기민하게 반응하던 강두(송강호)의 눈매로 끝을 맺었다. <살인의 추억>이 화면 바깥으로 시선을 던져 우리의 실재를 흔들어 깨웠던 것처럼 <괴물>의 강두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금 저 문밖에 그것이 있다’는 걸 우화적으로 보여주었다.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실재의 급습을 그만은 알고 있었고 주시한다. <괴물>에서의 사건은 해결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젠가 또다시 올 것이라는 경고로 남기 때문에 계속 블랙홀의 연장에 있는 것이다.

<마더>는 봉준호의 땀보다 정겨운 휴식 차원의 영화일 거라는 추측도 돌았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야기는 우리가 본 그대로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려 한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문아정이라는 여고생이 살해당하고 정신적으로 모자란 도준(원빈)이 범인으로 지목되고 그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엄마(김혜자)뿐이다. 스스로 수사관이 된 엄마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문아정이 마을의 남자들에게 쌀을 받고 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는 힘겨운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이 누구인지 문아정이 휴대폰에 찍어두었다는 사실도 따라 드러난다. 엄마는 결국 도준을 구하지만 도준은 사실 무죄가 아니었으며 문아정을 그가 죽였다. 그 대신 문아정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도원 종팔이가 누명을 쓴다. 엄마는 그걸 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춤을 춘다. 이것이 <마더>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사연이 있는 것 같다. <마더>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 그러나 그 면모를 통과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이 영화의, 다소 과장한다면 그 실체는 따로 있다.

주체의 곤경은 어떻게 오는가

아들이 위기에 봉착하고 엄마가 스스로 수사권을 발동하여 아들을 구했으나 실은 그 아들이 엄마까지 속인 진범이라는 이 사실. 세상 사람들이 다 속아도 엄마만은 진실을 알고 아들을 살려낼 수 있는 영웅으로 보였는데 속은 건 단 한 사람 그 영웅뿐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속지 않는 자가 오류를 범하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이상하다. 이쯤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마더>가 무척 낯익은 방식의 귀환임을 알게 됐다. 그건 영화의 유구한 역사 안에 장르의 한 형태로 있었던 것이다. 삶의 위기에 빠져 있는 혹은 자신의 상황이 그러하다고 호소하는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발을 들인 사립탐정 혹은 보험 수사관이 그녀의 갱생을 돕기 위해 나섰다가 결국 그 여인에게서 이중의 배신을 당하거나 죽음으로 내몰리는 이야기. 봉준호의 <마더>는 주인공들의 관계 구도와 구조상 엄연한 필름누아르의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말타의 매>에서 샘 스페이드(험프리 보가트)는 처음에는 원덜리라고 했다가 뒤에야 본명이 브리지드 오쇼네라고 밝히는 의심스럽지만 매혹적인 여인에게 사건을 의뢰받고 일에 착수하지만 곧 곤경에 빠지게 되고 그 음모의 장본인이 오쇼네임을 알게 된다. 이 여인을 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라고 그는 생각했지만 그런 그가 속는다. <이중배상>의 월터는 단순한 보험사 직원이었지만 어느 날 만난 멋진 유부녀 필리스의 요청으로 함께 계획을 세워 그녀의 남편을 죽이지만 곧 필리스에게 다른 남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녀를 죽이는 지경에 이른다. 이 여인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내는 오로지 나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의 착각이었다. 유사한 예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여기서 사립탐정과 여인 그리고 엄마와 아들이라는 성별 혹은 신분의 차이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건 둘 사이를 묶어놓은 힘의 관계 구도이며 그 힘이 끊임없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오인의 구조다. 그것이 확고한 주체라고 믿었던 자를 곤경에 빠트린다. <마더>가 필름누아르의 운명임을 밝히는 나의 의도는 그 점과 연관한 질문을 위해서다. 이른바 <마더>에서 ‘주체의 곤경은 어떻게 오는가’를 물어보기 위해서다. 필름누아르에서 주인공은 그 자체로 불확정적인 세계 속의 불안하고 파열된 주체로 돌아다닌다. 그는 늘 남보다 많이 알고 있으며 누구보다 통일성있는 주체라고 믿지만 결국 그가 속거나 오류를 범한다. 이때 그 주체의 곤경은 어떤 방식으로 오는가. <마더>에 그같은 과정이 있는 것 같다.

이 엄마가 얼마나 오해하는 주인공인지 그리고 <마더>가 얼마나 오인을 둘러싸고 진행할지에 관해 봉준호는 일종의 독법제시에 해당하는 괴이한 오프닝 시퀀스(이 부분은 잠시 뒤에 말해보자)를 지난 두 번째 시퀀스에서 본격적으로 보여주고 시작한다. 엄마가 약재상 안에서 작두질을 하며 바깥에서 개와 놀고 있는 도준을 본다. 뭔가 불안한 기운이 몰려오고 급하게 자동차 한대가 그를 아슬아슬하게 치고 지나가는 것 같다. 엄마가 달려나간다. 아들을 만지는 엄마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지만 그때 그 피는 아들이 흘린 것이 아니라 엄마의 것이다.

오인은 도처에 있다. 엄마는 아들이 자신만을 한 여자로 생각한다고 오인하지만 아들 도준은 늘 다른 여자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닌다. 엄마가 수사를 시작했을 때 처음 용의자로 물망에 오른 것은 도준의 불량한 친구 진태(진구)였다. 진태의 방 안에 숨어 들어간 엄마는 그곳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포착한다. 골프채에 묻은 피다.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바람을 뚫고 경찰서로 향한다. 이 글의 내용과 상관없이 말하자면 이때 골프채를 어깨에 메고 씽씽 걸어가는 엄마를 묘사하는 장면은 엄청난 감정의 파토스를 자극하는 멋진 장면이다. 골프채에 씌운 비닐장갑과 그걸 신나게 흔드는 바람, 바람을 헤치고 전진하는 엄마의 착각된 발걸음. 하지만 그것은 미나의 립스틱으로 밝혀진다. 엄마는 하나도 알지 못한다. 결국 아들이 문아정을 죽였다는 사실조차도.

봉준호는 그저 오인의 기호를 나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것 같다. 서사적으로 그 오인의 기호가 주체의 착각을 앞으로, 또 앞으로 밀고 나갈 때 거대하게 등장하는 시각적 틈바구니 즉 시각적 장치로서의 블랙홀이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 검은 터널은 후반부의 결정적 상징이었지만 <마더>에서 문아정이 돌을 던지던 그 폐가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검은 골목길은 모든 사건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회귀의 검은 원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검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일어났던 도준과 문아정의 일은 영화 내내 생략이라는 서사적 블랙홀을 함께 담지하며 전진한다. 또는 약재상의 안과 밖이라는 장소의 구분을 나눈 다음 도준-차, 도준-제문, 제문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진태의 집에서 커튼을 사이에 두고 진태와 미나의 섹스를 보는 엄마나 종국에는 폐가 안에서 도준-문아정의 사건을 본 고물상 늙은이의 시점 숏들은 이 오인의 구조와 얼마간의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 장면들이 각각의 자리에서 산술적으로 정교하게 배치되었을 때 위기를 동반한 영화적 감정이 고조되는 건 물론이지만, 유사한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는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혹은 어떤 일을 믿어야 할까’를 놓고 반 발짝 앞서 고민하게 된다. 이번에도 잘못된 판단에 휩쓸리는 건 아닐까, 라고.

기억은 불길함과 함께 돌아온다

이 지점에서 더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이제부터 말할 것은 엄마의 문제가 아니라 범행을 저지른 도준의 문제다. 엄마는 오인을 하지만 도준은 기억상실을 한다. 기억상실이란 누아르의 주인공들을 괴롭혀온 오래된 질병이며 다시 돌아온 네오누아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친숙하게 아는 가까운 예가 있다. <메멘토>에서 주인공은 뒤로 회귀하는 사건들을 따라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 같지만 결국 범행을 저지른 것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엔젤 하트>에서 미궁의 사건을 파헤치던 형사가 마침내 만나게 되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모두를 잔인하게 살해한 건 그였다. 오인의 주인공을 일면 엄마에서 도준으로 바꿔놓고 보면 <마더>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집요하게 다뤄지는지 알 수 있다. 도준은 문아정을 죽인 뒤 이렇게 말한다. “학생 왜 이런 데 누워 있어?” 그는 꼭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한다.

이 문제는 점점 집요해진다. 누아르에서 주체의 자기 완결성을 갉아먹는 기억과 기억상실이 주요하게 부각될 때마다 동반해서 찾아오곤 하던 영화의 장치, 플래시백. <마더>를 본 사람들이 봉준호가 그간 주요하게 사용하지 않았던 플래시백을 유독 이 영화의 자리마다 구체적으로 배치한 이유에 관해 묻지 않는 건 이상해 보인다. 그 플래시백은 도준이 박카스 병을 건네받는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을, 사건의 결정적 증인으로 인도할 사진관 미선의 “생기초…”로 이어지는 진술을, 문아정의 일화를 묘사하는 불량학생들의 묘사를, 그리고 고물상 늙은이의 진술을 차례대로 보장해준다. <마더>에는 기억을 상실하는 것의 문제가 거세지는 것과 함께 플래시백으로 기억이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돌아오는 기억이라는 것이 좀 의아하다.

누구보다 그 의아함은 엄마와 관련되어 있다. 엄마는 도준을 면회 갈 때마다 그가 꼭 해야 할 일을 말해준다. 껄렁거리는 변호사를 데리고 갔을 때에도“너는 기억에 매진해야 돼”라고 도준에게 말한다. 그리고 도준의 흐릿한 기억은 엄마의 말을 잘 듣고 꼭 돌아오고야 만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긴다. 도준의 돌아오는 기억은 늘 필요한 자리가 아니라 필요치 않은 자리로만 돌아오는 것이다. 사건의 문제가 그래서 점점 커지는 것이다. 예컨대 백미러를 깬 건 자기가 아니라 진태라는 사실을 도준은 당시에는 기억을 못하지만 그게 소용없어진 감옥 안에서 기억해낸다. 이건 하나의 신호에 불과할 것이다. 엄마가 이번 사건에 대해서 기억해내라고 종용할 때 도준은 “아 생각났다”며 엉뚱하게도 다섯살 때 박카스에 약을 타서 자기를 죽이려 했던 엄마의 행위를 기억해낸다. 기억은 기억인데 다른 내용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은 계속 헛돌고 있으며 공백을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 공백. <마더>가 2.35:1 시네마스코프의 화면비로 얻고자 한 미학적 성취 과제는 여러 가지였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인물을 제외한 나머지 자리들이 무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놓인 상태로서의 공백을 한 프레임 내에서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설명해보자. 왕가위의 <2046>에서 그 시네마스코프의 화면비율은 그들의 감정의 전이인 것처럼 보인다. 고독이 흐르는 여백. 일본영화의 어떤 전통에서 그 화면비율은 무사들의 저 먼 배치와 대결의 구도를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춰왔다. 박찬욱의 영화에서라면 인물이 그 화면비율의 한쪽에 있을 때 그 여백이 아니라 인물이 훨씬 더 도드라져 보인다. 그때 여백은 인물에 헌신한다. 하지만 <마더>에서 그 나머지 빈자리란 무엇보다 말 그대로의 공백이며 또 다른 주인공이다. 즉 한쪽에는 인물이 또 한쪽에는 나란히 그 인물이 ‘알지 못하는 공백’이 한 화면 안에 동시에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많은 공백이 있다 하더라도 엄마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리는 엄마의 마지막 선택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엄마는 침을 놓으면 모든 나쁜 기억을 잊을 수 있는 허벅지 안쪽의 혈자리를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라스트 시퀀스에서는 기어이 그렇게 한 뒤 잊기를 스스로 간청한다. 엄마는 기억이 자꾸 다른 불길한 것까지 묶어서 원치 않을 때 온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은 것 같다. 그러므로 엄마의 의도된 망각은 다시 돌아올, 그러나 원치 않을 때 돌아오고야 말 기억의 회귀를 방지하고 싶어 하는 염원일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기가 믿었던 것에 자기가 속고 스스로 파멸했다는 상처를 잊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물어보고 싶어진다. 엄마 혜자는 정말 상처를 잊을 수 있을까.

인정투쟁이 낳은 비극

나는 <마더>의 주체가 어떻게 곤경에 처하는지를 보려 했다. 하지만 <마더>에 내재된 질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만약 그 정도였다면 <마더>는 필름누아르의 구조적 세계관을 영민하게 변환한 쾌감 정도만 주었을 것이다. ‘다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곤경에 빠진 그 주체는 다른 그 무엇과 지속적으로 연루된다. 그 다른 화두를 좇다보면 결국 이 영화가 현실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 점을 말하기 위해 봉준호가 <마더>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김순경 사건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봉준호는 김순경 사건에서 <마더>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혔다. 여관방에서 애인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렸던 아들의 무죄를 가족들이 직접 나서서 증명하고 밝혀낸 실화라고 한다. 그런데 김순경 사건과 거기에서 영감을 얻은 <마더>에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가족이 자위권을 발동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가족의 일원을 구출해낸 실화가 김순경 사건이라면 <마더>의 엄마는 겉으로는 김순경 사건과 같은 결과를 얻었지만 실제로는 실패한 것이고 죄의 공은 다른 쪽으로 넘어간다. 기도원 종팔이에게로 간다. 이 종팔이를 꼭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그에 관해 말할 차례가 올 것이다.

한편 봉준호는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에서 성욕과 섹스가 은밀하게 감싸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 스스로의 해석은 뛰어나며 매력적이다. 그날 밤은 분명 미친 욕정이 스멀거리는 밤이었다. 도준을 가리켜 술집 여사장은 발정난 개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섹스는 결국 이 작은 마을의 숨겨진 실체를 길어올리기까지 하니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 봉준호가 말하지 않은 다른 걸 말해보고 싶다. 김순경 사건에서 시작했으나 실제 김순경의 가족들은 성취했어도 <마더>의 엄마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관해서다. 섹스로 점층화되어 길어올려진 실재, 라는 점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더 들여다보면 다른 궁극적인 무엇이 사건을 부르고 해결하려 한다. 이 사건은, 그러니까 도준과 문아정의 사건은, 문아정의 죽음은, 잘못된 욕정 때문이었을까. 정욕의 밤이긴 했지만 정작 그 성적 패악을 위해 도준은 문아정을 해친 것인가.

문아정은 도준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 그 돌은 문아정의 옷을 벗기거나 몸을 차지하려는 위협에서 던져진 돌이 아니었다. 섹스를 위해 던진 돌이 아닌 것이다. 문아정이 “이 바보 같은 새끼야”라고 말하자 도준이 돌을 던졌고 의외로 멀리 날아가 문아정의 머리에 맞았다. 영화에서 도준이 화내는 장면이 몇 군데 있는데 전부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때다. 영화에서 도준은 그 말을 한번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도준이 그때마다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건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대로서 화를 낸다. 그날 밤 도준은 문아정에게 저속한 농지거리를 했지만 문아정이 바보라고 부르지만 않았다면 추측건대 그냥 집으로 얌전히 돌아갔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다. 아니 어쩌면 도준은 정말 문아정과 섹스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문아정은 동네의 중학생 꼬맹이들까지 “쌀떡소녀”라는 수치스러운 별명으로 부를 만큼 은밀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휴대폰에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많이도 찍혀 있다. 쌀떡소녀라는 말은 다름 아닌 찍힌 그들이 염치없이 퍼뜨리고 다닌 말일 것이다. 그러니 도준도 그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문아정에게 인정받은 것처럼 자기도 패악으로나마 인정받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성적으로 인정받기는커녕 인간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우연이지만 문아정을 죽였다.

<마더>에서 그날 밤 사건은 도준의 성적 욕망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것이 촉발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도준의 ‘인정투쟁’이 일으킨 사건이며 그 인정투쟁의 비뚤어진 비운의 결과다. 이 인정투쟁이 <마더>의 앞서 말한 다른 무엇이다. 도준뿐이 아니다. <마더>에는 상처받은 인정투쟁의 혈흔이 곳곳에 있으며 때로는 사건으로 때로는 그 미완의 해결로 이른다. <마더>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인정투쟁을 행하고 또 실패한다. 그렇다면 <마더>에서 인물들은 어떻게 ‘인정투쟁이라는 과정을 거쳐 비극에 이르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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