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0년입니다. 주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영화 진흥정책이 형성-집행-평가되는 협치(거버넌스) 체제의 중요한 한축을 맡고 있는 영진위 출범 10년을 모른 체하기 어려워 몇 마디 보탭니다.
비전과 목표를 올바로 세우는 정책개발 능력, 세운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집행 능력, 결과를 평가하고 그 평가를 기초로 자기반성과 개혁을 통해 유사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정책학습 능력, 흔히 이 세 가지를 국가 혹은 정책 수행기관이 갖춰야 할 필수 역량으로 꼽습니다. 멀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코 오래지 않은 시기, ‘국민의 정부’는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절실하다는 사실에 공감했고, 필요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더 나은 영화정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영화인 스스로의 주도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영화인에 의한 영화인을 위한 영진위를 출범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공감이나 인정은 영화계의 자구노력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 확보와 영진위 출범은 영화계가 “주도한” 성과였습니다. 결국 영진위는 한국영화계의 역량을 가늠하는 표본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근거없는 모략은 차단해야 옳았습니다
제가 평가하고 기억하기로, 시네마테크협의회의 출범은 시네마테크 활동가들과 영진위가 협력한 성과입니다. 좀더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타박은 받았을지라도, 3기 영진위까지 시네마테크 활동의 가치와 협의회의 주도성은 조금도 의심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4기 영진위에서는 이런 원칙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영화관객이나 영화계 바깥 사회구성원들을 향해 있어야 할 귀하고 귀한 영화계 얼굴들이 위원장 한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습니다. 이 일은 영화계와 영진위 사이의 상호 존중과 신뢰가 뒷받침되는 참여형 거버넌스의 근간을 흔든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동안 투자조합을 둘러싼 온갖 의혹이 확대 재생산되었습니다. 급기야 영화 제작비를 부풀려서 정치자금을 조달한 혐의를 내사한다는 황당한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영화계 바깥에서 영화계를 향해 가해지는 근거없는 비방, 영화계 전체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하는 모략을 영진위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당연히 차단해야 옳았습니다. 이분들은 그 비방을 조장하거나 방조하는 편에 섰습니다.
4기 영진위 출범,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스스로의 실력으로 평가받기보다 이전 영진위 구성원들을 폄하하거나 음해함으로써 이득을 보려는 태도, 이제 바꿔야 합니다. 위원장의 일방적인 정책 결정은 ‘참여’와 ‘책무성’이라는 위원회가 가진 좋은 거버넌스의 원칙을 흔드는 일입니다. 영진위의 일방적인 선도성의 욕망이 반영된 “한국영화 재발명”이라는 허구적인 구호는 한시바삐 파기되어야 합니다.
자동지원 반대, 제작지원은 유지를
영화발전기금 50%를 제작사에 돌려주겠다는 자동지원제도 도입, 반대합니다. 제도로서 정착되기 어렵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사에 대한 기획개발비 지원, 필요합니다. 영진위에서 이미 검토한 바 있는 제작사 혹은 해당 작가에 대한 사후지원을 대안으로 살펴보기를 권합니다. 물론 다른 제작사나 작가들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개발비 지원도 그만큼 강화되어야 합니다. 프랑스의 자동지원제도는 방송쪽에서 들어오는 영화발전기금이 영화관에서 걷히는 기금 규모와 비슷하기 때문에 성립됩니다. 영화/영화계의 방송 부가창구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제작, 배급, 상영을 맡는 주체들 모두에 자동지원합니다.
제작지원제도를 없애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대신 투자조합 출자를 늘리자고 합니다. 받아들여선 안됩니다. 문화적인 협력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유럽연합 27개국의 인구는 무려 4억9600만명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큰 시장과 투자위험 분산 덕분에 예술영화의 경우도 어느 정도는 선순환구조를 갖췄습니다. 아직 우린 아닙니다. 시장의 독자성이 상당히 크고, 규모도 적습니다. 여전히 직접지원제도와 투자조합을 통한 간접지원제도가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올해처럼 영진위가 주도적으로 투자조합의 투자와 영진위 지원을 묶어내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압력이 되어서 투자조합의 자율성을 침해하거나, 가치판단의 균형이 투자자쪽으로 쏠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진위는 제작지원을 통해 투자자 리스크를 줄여주면 되는 일입니다. 투자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서 영진위 지원결정을 받고도 다른 투자를 못 받는 경우를 피하려는 의도라면 투자조합의 투자여부를 영진위 지원 결정의 기준으로 넣거나, 투자자와 제작사가 공동으로 지원신청을 하게 하면 될 일입니다.
‘와라나고 사태’로 기억되는 2001년에는 이구동성으로 작고 알찬 영화가 너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그 시기에 수립된 예술영화관 지원사업은 예술/다양성영화지원사업의 정착과 함께 확대돼왔습니다. 독립영화 용어와 다양성영화 마케팅 지원의 부활은 당연한 조치이고, 현재 수준의 다양성영화 제작지원제도 역시 유지하는 게 맞습니다. 지원성과가 적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근거를 보여주고 반박해야 합니다.
통합전산망을 못하겠다니요?
수익성을 높이는 일에 대해서 살펴보지요. 먼저, 홈비디오를 빌리거나 살 곳이 없다는 비디오 업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필요한 지원책을 제공해야 할 겁니다. 설사 성과에 대한 확신이 약하더라도, 절박하므로 필요해 보입니다. 과거 불법행위를 해온 온라인서비스 업체들에 영화를 공급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쟁점인 온라인 유통에 대해서는 거래 정보의 투명성을 전제로 한 공급기회 확대쪽으로 논의를 끌어가야 합니다. 아울러 궂은일을 맡다보면 때로 과도하게 비판받을 수도 있는 것이니, 부디 “통합전산망 못하겠다”는 얘기는 영진위쪽에서 거둬들여야 합니다. 영진위가 안 하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합니까?
방송통신 분야와의 정책적 결합을 위해 영화계가 함께 힘써야 합니다. 여론을 등에 업을 만한 명쾌한 논리를 내놓고, 차근차근 설득해야 합니다. 영화 ‘콘텐츠’를 연결고리로 하는 방송통신 업계와의 상생협약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예컨대 영화 제작에 대한 방송통신기금 배분이나 영화관의 출혈이 없는 통신카드 마일리지 할인 등이 방안일 수 있습니다.
각 지방정부의 영화 지원정책을 아우르고 조정하는 역량을 보여줘야 합니다. 서울시의 디렉터스 존과 프로듀서스 존 같은 공간 지원사업을 고려한 보완적 사업 구상이 필요합니다. 다른 지방정부도 기획개발이나 제작지원 같은 실질적인 지원에 나서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노동조합의 경영 참여 문제도, “자율적인 책무를 확고히 하는 유능하고 동기유발이 잘된 공직자들의 사명감, 열정, 자부심”이 ‘올바른 리더’ 그리고 ‘사회적으로 폭넓은 공감대 형성’과 함께 앞서 말한 정책능력의 세축을 이룬다는 점을 충분히 살피기 바랍니다.
남에 대한 비판은 곧 비판하는 자 스스로의 행동규범을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남에게 했던 비판은 결국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깁니다. 부디 영화계로부터 신뢰받는 영진위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