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침 중 이가는 버릇이 있냐며 입속을 검진하던 치과의가 내게 묻는다. 치아가 고르게 마모되었다며. 그러나 동침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상습적 이갈이 습관이 내게 없다고 말한다. 양 송곳니조차 둔탁하게 빻아진 연고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당사자는 원인을 알지만 주치의에게 실토하진 못했다.
턱이 얼얼할 만큼 이를 꽉 문 채 몰입하는 ‘신성한 시간’이 내게 있다. 눈과 입이 단단히 봉인되어 바깥세상의 구원으로부터 차단된 한 사내가 기둥에 결박되었다. 의식이 그를 깨울 무렵 그의 콧잔등을 각목이 가격한다. 코뼈가 주저앉는 미세한 느낌이 각목을 쥔 손으로 전달된다. 선혈이 사방에 튀고 사내는 가여운 몰골이 되지만, 측은지심은 금물. 그가 초죽음이 될 때까지 매질은 멈추지 않는다. 마무리는 증거인멸. 벗긴 옷, 신분증 그리고 알몸에 시너를 충분히 부은 뒤 불을 댕기고 자리를 뜬다. 잿더미가 된 현장에서 경찰과 언론은 신원미상의 남성의 사망을 확인하지만, 노숙인의 부주의가 낳은 화재로 결론짓는다. 하지만 그가 여신도를 상대로 성폭력을 일삼던 종교 지도자였음을 아는 이는 오직 나뿐. 납치, 감금, 폭행, 방화의 전 과정이 내 단독 범행이므로.
(일단 한숨 내쉬고) 상기된 사건이 허구임은 불문가지다. 결박 대상은 천문학적 공금을 횡령하고 제 국민에 총질을 하고도 건재한 전직 국가수반, 죗값이 명백함에도 자리에 연연하는 구시대적 법조인 등 쉴틈없이 로테이션되지만, 이들을 하드고어하게 응징하는 정의의 사도만은 항상 내 차지다. 그러나 공상이 항상 순조롭진 않다. 공상은 현실적 조건을 계산한 채 전개되므로. 사설 경비와 공권력의 경호가 에워싼 공공의 적들에 내가 접근할 도리가 일단 묘연하다. 원거리 소총 저격을 열어둔다. 하지만 단발 명중을 위한 사격 연습을 평소 어디서 한단 말인가? 저격이 성사되어도 전문 경호원이 깔린 현장에서 퇴로 확보가 가능할까? 나는 운전면허도 없다. 우여곡절 끝에 아비규환의 수라장 속에 위기를 모면한들 폐쇄회로TV 분석으로 나는 유력 용의자로 공개 지명될 것이다. 공상 속 위기의 순간마다 이를 꽉 문다. 비평의 진정성이 정당한 분노로 출발한다는 말로, 나의 반인륜적 공상이 양해를 얻을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한국사회의 경직된 정서 안에서라면. 예술의 한 본질도 구조적 부조리에 맞서, 공분의 표출을 세련되게 가공한 건지도 모른다. 실존 연쇄살인범 에드 게인의 살인 행각에서 단서를 얻은 <양들의 침묵>과 <싸이코> 같은 허구적 걸작은 그 완성도와 권위로 상찬되지만, 동일한 플롯을 머릿속에 담는 건 지탄의 대상이다. 행여 그것이 실행될까 두렵다고도 한다. 참 근심도 많다.
사회정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못하는 시공간일수록 대리 충족을 위해 예술이 분투한다. 물론 그런 예술은 아름답고 숭고하지만 거악의 원인 제거에 이르진 못하며, 보는 이에게 때론 무력감도 안긴다. 나의 반인륜적 공상 취미가 플레저인 건 명백한데, ‘길티’한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어제도 대화 도중 이를 꽉 물고 몸을 움찔하는 모습을 포착한 친구가 나를 툭 건드리며 묻는다. “이놈! 또 무슨 생각했어?” 무슨 생각은. 한놈 또 죽였다 어쩔래.
반이정 미술평론가. <한겨레21> <씨네21> <중앙일보> 등에 연재를, EBS, TBS 라디오에 미술 패널로 고정 출연을 했다. 대학에는 미술 관련 강의를 나간다. 현재적 관심사는 자전거, 상시적 관심사는 미소녀다. dogstylis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