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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만난 노무현 후보의 영화 이야기
2009-06-09

<씨네21>은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2년 11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단독 인터뷰했다. 선거운동이 진행돼 20분 정도밖에 할애받지 못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특유의 달변으로 개인적인 영화 취향과 표현의 자유문제 등에 관해 답변했다. 바쁜 일정을 감안해 스크린쿼터, 독립영화 같은 정책적인 사안에 관해서는 서면으로 문답을 진행했다. 다음은 당시 인터뷰 중 주요 부분을 요약한 내용이다.

“<라이언의 딸>에 깊은 공감”

-얼마 전 장애인들과 함께 <오아시스>를 보러 가셨던데요. =눈 가리고 가려니까 정말로 눈앞이 깜깜하더구먼. (웃음) 단지 시각적으로 앞이 안 보인다는 게 아니라 심리적으로 깜깜해져요. 영화를 볼 때는 귀를 막았는데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결국 그 체험은 성공을 못했습니다. 바깥에 마개 덮고, 안쪽 귀도 봉했는데 다 들리더라고.

-극장엔 자주 가시나요. =어쩌다 한번이죠.

-오래전에 봤어도 꽤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 영화가 있잖습니까. =그런 영화가 있긴 하죠. <라이언의 딸>이라고, 개봉할 땐 <라이언의 처녀>라고 번역되어 나온 영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때가 1973, 74년쯤 됐나요. 제가 군에서 제대하고 고시공부하고 있을 때니까.

-30년이 다 되어가는데요. 기억에 남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영화를 도덕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해석했거든요. <오발탄>도 그랬고. 아니면 <엘시드>나 <왕중왕> 등 범인들이 따라갈 수 없는 영웅이나 초인들이 이뤄낸 행적을 그린 영화를 즐겨 봤어요. 그런 영화들을 대하면서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받고, 그게 아니면 그냥 재밌을 것 같은 영화로 넘어가고 그랬는데 <라이언의 딸>을 보고 그런 것이 깨져버린 거예요. 평범한 한 여인이 자연스럽게 남자에 대한 사랑에 끌려 선생님을 사랑하고, 또 권태를 느끼자 영국군 주둔군을 사랑하고 그러면서 여인은 마을 사람들과 갈등을 겪게 되고 반역자로 몰리는 내용인데. 그 여인의 선택을 보면 어떤 도덕적 기준에 억눌려 있지 않아요. 영화 보면서 제가 도덕률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그 여성의 처지에 대해서 깊은, 아주 깊은 공감을 하는 거예요. 그 자체로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할까. 첫 번째 남편을 배반했으니 부도덕한 사랑이고, 주둔군을 사랑했으니 공동체에 대한 배반이고. 도덕적 규범과 충돌하는 한 인간의 감성이랄까, 이런 것이 어쩐지 강하게 남는 거죠.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예전엔 꽤 영화를 즐겨보신 듯한데요. =빠짐없이 챙겨보진 못했어요. 그 당시에 유명한 영화들은 뒤늦게나마 재개봉관에 가서라도 보려고 노력하는 정도였죠. 아내하고 데이트하면서 극장은 많이 갔어요. 처음 연애할 때 본 영화가 <러브스토리>인데, <라이언의 딸>도 아내와 같이 봐서 조금 더 인상적일지도 몰라요.

-좋아하는 배우가 있다면. =한석규씨 이야길 해야 하는데 영화는 많이 못 봐서 제가 재밌게 본 드라마 이야기로 대신할게요. 김운경씨가 썼나요, 왜 <서울의 달>이라고 있잖아요. 무엇보다 전체 극 분위기가 좋았고, 거기서 한석규씨가 맡은 캐릭터를 보면서 대리만족 같은 것을 느꼈어요. 우리도 왜, 규범을 일탈해서 좀 건들거리고 싶은 생각이 있잖아요. 그런 잠재적인 충동을 한석규씨를 통해서 대신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게 어느 정도냐면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그 인물은 즐기고 사는 것 같았으니까. 그로서는 벗어던질 수 없는 인생을 처절하게 살고 있는데 제가 보기엔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그가 우리가 누려보지 못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이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때 분위기 때문에 한석규씨를 좋아해요.

-문성근, 명계남 등 곁에서 후보를 돕는 이들말고도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등 노 후보를 지지하는 영화인들이 많은데요.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권력이란 게 우리 생활에 대한 간섭과 규제를 많이 하죠. 유력하다고 하는 두분(이회창 후보와 정몽준 후보를 지칭하는 듯)은 지시명령형 인생을 살았습니다. 지배형 인생을 살았습니다. 저는 지시명령형이 아니라 항상 권력의 억압에 대해 제도적으로 저항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과도 다른 점은 오랫동안 총재로 군림하지 않았거든요. 군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훨씬 더 개방적일 거다, 저를 지지하는 문화인들이 그런 판단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 지지에 보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하 서면 답변)

-표현의 자유에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시는지요. =김지하 시인이 <오적>을 써서 감옥 가고 많은 예술가들이 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불행한 과거를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와 독재권력이 득세하는 사회일수록 예술의 자유는 억압받게 마련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사회 민주화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근래 와서 문화쪽의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의 분위기와 제도가 풀리면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론 표현의 자유를 거의 제한없이 인정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공중파 방송 등 안방에 그대로 들어가는 것은 무차별적인 침투이기 때문에 사전 장치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후규제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창작표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이잖습니까. 제한하기 전에 수용되어야 할 권리입니다.

-스크린쿼터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십니까. =국가간에 자유롭고 호혜로운 문화교류를 막아선 안됩니다. 장벽이 있어서도 안되고, 서로 자극과 충격을 줘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전제가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시장논리에 문화가 휩쓸리도록 맡겨둬선 안됩니다. 지금 미국 할리우드영화가 전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스크린쿼터는 문화정체성 보호를 위해 꼭 필요한 최소 안전판이라 봅니다(그러나 불행히도 스크린쿼터는 노무현 정부의 FTA 추진과 함께 희생양이 돼 연간 146일이던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는 73일로 줄어들었다.- 편집자).

-지난해 <고양이를 부탁해>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 완성도 높은 저예산영화들이 극장으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저예산영화, 예술영화들이 극장을 잡기 힘든 상황입니다. 독립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위해 작은 영화들을 살려야 합니다. 중앙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자율성과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문화는 죽습니다. 독립영화, 예술영화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업적 이익이 아니라 예술성과 현장성으로 무장한 실험영화들이 더 많은 관객과 만나야 영상문화 전체가 살찔 수 있다고 봅니다. 우선 전용관을 지속적으로 확충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영화진흥금고 중에서도 독립영화, 예술영화 지원 비율을 5∼10%까지 확대하여 독립제작 여건을 개선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정책은 비단 영화쪽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더그라운드 밴드 등 음악쪽도 마찬가지이고. 문화예술 전반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정책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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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378호, 2002년 11월26일치 특별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