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막고 싶을 때가 있다.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을 만날 때 그렇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큰소리로 핸드폰 통화를 하는 이들 정말 싫다. 그는 두배로 싫은 경우였다. 며칠 전 아침 출근길, 전철 안에서였다. 50대 중반의 사내가 선 채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아, 어제 북한 핵실험 했잖아. 이제부턴 그게 톱뉴스야. 그 인간 떨어져 죽은 거 암것도 아니게 됐어. 걱정하지 마. 끝난 거야!” 중년의 갈라진 음성이 객차의 적막을 흔들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비아냥거리며 즐기듯 계속 떠벌렸다. ‘애도 정세’에 대한 반감을 시위하는 듯했다. 누군가가 제지하거나 시비를 걸어주길 은근히 기다리는 포즈였다. 그걸 기화로 악다구니 한판을 벌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눈치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승객은 무표정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한다는 듯.
나도 마음을 다쳤다, 라고 쓰려니까 어색하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지난 한주 동안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마음을 진하게 표현했다. 한줄 더 보태는 건 진부하고 의미없어 보인다. 조금은 민망하고 썰렁했던 그와의 인연(10년 전 공중목욕탕에서 우연히 조우했다거나, 대통령 후보 시절 함께한 저녁식사의 말석에 앉았다가 딴 약속이 생겨 무례하게 자리를 떴다는)도 주절주절 써보려다 만다. 전혀 애틋하지 않거니와 분위기 깨는 것 같다. 공적인 기억도 좋지만은 않다. 시사주간지를 만들 때 ‘대통령 노무현’을 줄창 깠던 것 같다. 이라크 파병에 관해선 “미친 짓”이라는 단어를 넣은 표지를 두번이나 만들었다. 독자들은 통쾌해했고, 덕분에 상도 받았다. 한-미 FTA도 씹기에 참 좋은 껌이었다. 임기 말엔 “노무현도 맛이 갔다”는 기조의 기사를 자주 내보냈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냥 마음이 지독하게 아플 뿐이다. 이 글을 쓰기 직전에 전화 통화를 나눴던 한 선배는 “생전에는 심하게 비판만 해 미안하다”면서 울먹였다. 진심으로 비통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시대의 가치를 상징했던 그의 죽음을 가족의 죽음처럼 여겼다.
일부 뻘소리를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국민적 추모열기’가 뜨거웠다는 건 분명하다. 세상이 바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렇기에 어쩌면 더 두렵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 펑펑 눈물을 흘린 관객의 감정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분향소와 영결식장에 구름 같은 인파가 모였지만, 극장에서 울고 나온 관객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안색을 바꾸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걸 기다리는 집단이 있다. 전철에서 패악질을 부리고 싶었던 앞의 사내처럼 말이다. 잠시의 휴식이 끝난 뒤, 뭇매와 이지메는 다시 시작될까. 가령, 한예종 다음의 표적은 어디일까. 그게 더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