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절 원없이 그를 사랑했기에 미안함은 그리 많지 않다. 소식을 듣자마자 오히려 그가 어른이 아니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치욕을 견디는 것이 어른이니까. 그리고 그가 제 분을 못 견딘 거 같다는 짐작을 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억울하면 끝까지 싸우는 사람이다. 한 시대의 분노가 불러낸 사나이가 노무현이고, 그는 분노가 있는 한 버틸 힘이 있는 사람이니까. 타협 못하는 성정의 그런 ‘노무현스러움’이 그를 한 시대 최고 권력으로 밀어올렸지만, 이미 그 시대는 지나지 않았나.
스스로 세운 강고한 도덕적 기준에 자신과 주변이 못 따랐다면, 도무지 싸울 수조차 없이 과장되고 졸렬한 방식으로 진실이 호도되고 왜곡됐다면, 그 자체를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까. 그는 도덕성을 넘어 무오류성에 도전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집권 시기 얼토당토않은 몇몇 정책을 보고 그가 “나는 선하다. 곧 나는 옳다”의 착각에 빠진 게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다. 의심은 봉지만 뜯긴 채 선반 위에 올려졌고 나는 그걸 정리할 시간을 미처 갖지 못했다.
하지만 한점 허물과 결함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냐고.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자기기만과 오류에 범벅돼 살아간다. 원치 않은 굴욕과 수치를 받기도 주기도 한다. 못난 이들은 죽을 힘도 없지만, 그런 못난 힘들이 꾸역꾸역 삶을 밀고 가는 거잖아. 그리하여 나는 그가 끝내 오만한 인간이라고 여겼다. 참으로 나쁜 지아비이자 가장이라고 생각했다. 밀려드는 애도의 물결이 불편했고 쏟아지는 여러 유형의 말들이 힘들었다. 때맞춰 나서는 유명인들도, 눈치 보듯 비슷한 ‘톤 앤드 무드’로 편집되는 미디어들도 보기 싫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는 모든 죽음은 개별적인 것이라 믿으며 그를 빨리 잊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가 그립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립다. 하얀 발가락 무좀 양말을 신은 모습이 담긴 미공개 사진을 봤을 때였을까. 투신 직전 경호원에게 (아마도 일부러) 심부름 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을까. 벼락치듯 실감이 났다. 이 뒤늦은 그리움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천천히 뒤끝 길게 그와 이별할 것 같다. 슬로 굿바이 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