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스틸이 없으면 비디오가게로 갔다. 1994년의 일이다. 당시 내가 일했던 매체에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숨은비디오찾기’라는 연재를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소개하는 칼럼이었는데, 늘 사진자료가 문제였다. 찾다찾다 못 찾으면 서울 강남의 어느 유명한 비디오대여 체인점으로 달려갔다. 명작으로 분류되는 옛날 비디오를 많이 구비했던 곳이었다. 그곳 사장의 양해를 얻어 비디오재킷을 빌려와, 회사에서 스캔을 뜬 뒤 돌려주곤 했다. 순전히 그 비디오점과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심부름을 도맡아했던 기억이 난다(퀵서비스도 없었으니까). 그 비디오체인점에선 영화 소식지도 정기적으로 냈다. 그러고보면 당시 영화문화의 중심엔 비디오점이 있었다.
요즘엔 아무리 동네 주변을 둘러봐도 ‘비디어대여점’ 간판이 없다. 주로 ‘책대여점’에서 비디오와 DVD까지 빌려준다. 무협지나 만화책이 메인으로 취급된다. 비디오와 DVD의 소장량도 적어, 이름이 조금만 낯설다 싶으면 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간간이 대여점을 이용하는 편이다. 아직은 고전적 방법이 편해서다.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 하면 타박당하기 일쑤다. “요즘 누가 DVD를 돈 주고 빌려보나?” 그렇다. 불법 다운로드의 드넓은 세계가 있다. 특히 20대나 30대의 젊은 축들이 정통한 편이다.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는지 일장 브리핑을 듣곤 했다. 어떤 이는 2009 아카데미 시즌 출품작 전부를 세계적인 불법 다운로드망을 통해 리뷰했다고 자랑했다. 또 다른 이는 건당 140원을 내고 다운로드하는데 화질도 죽여준다며 사이트를 소개해줬다. 한번 맛을 들이면 끊기가 힘들다고 했다. 140원짜리 마약인 셈이다.
하지만 불법 다운로드가 계속 번창하기는 쉽지 않다. 얼마 전 누군가는 마법의 주문 같던 다운로드 키워드가 더이상 회사 인터넷 서버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했다. 영화사나 배급사가 위탁한 전문 단속업체의 감시망이 촘촘해지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불법 영상물을 기술적으로 차단하려는 노력도 뜨겁다. 지난 5월13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디지털콘텐츠네트워크협회가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불법영상물공동모니터링센터 설립과 DNA 필터링 기술 도입을 발표한 일은 여기에 속한다(20~21쪽 참조). 불법 다운로드의 대안은 합법 다운로드다. 여기에 좀더 많은 콘텐츠 제작자들이 공급자로 참여하고 수요자들이 부응한다면, 한국영화의 부가판권시장이 오래전 비디오시장 같은 성시를 맞이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다운로드가 실크로드가 될 가능성이다.
최근 <씨네21>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영화 VOD 서비스를 시작했다. 씨네21i에서 배급하는 4천여편의 영상 콘텐츠는 47개 웹하드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이젠 착한 다운로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