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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의 영화 판.판.판] 유통 진영의 독주 예고
문석 2009-05-18

싸이더스FNH의 최평호 신임 대표

싸이더스FNH의 고위층 인사이동이 마무리됐다. KT는 5월14일 열린 이사회에서 최근 사퇴한 차승재, 김미희 대표를 대신해 최평호 전무를 싸이더스FNH의 신임 대표로 임명했다. 김미희 전 대표는 제작본부장을 맡게 된다. 이번 싸이더스FNH의 인사이동은 단순히 인물 교체라는 의미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표면적으로야 그동안의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징계성 인사조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영화산업의 변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물교체라는 전경에 가렸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번 인사이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싸이더스FNH가 지금의 제작 중심에서 투자·배급 위주로 비즈니스를 전환한다는 사실이라고 본다. CJ엔터테인먼트에서 한국영화 투자·배급을 담당했던 최평호 전무를 대표이사로 임명한 것도 이러한 포석의 일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는 현대 한국영화산업에서 대립과 협력의 이중주를 펼쳐왔던 ‘콘텐츠 진영’과 ‘유통 진영’의 힘겨루기에서 유통 진영이 완승을 거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돌이켜보면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영화 제2 르네상스’에서 초반 흐름을 주도했던 것은 콘텐츠 진영이다. 상업적 감각과 새로운 역사의식, 신선한 기획력으로 무장한 젊은 프로듀서들은 일련의 기획영화를 내놓으며 시장을 이끌어나갔다. 삼성, 대우 등 대기업 자본은 프로듀서들의 주도권을 인정하며 영화사업을 펼쳤다. 90년대 후반부터 CJ, 오리온, 롯데 등이 차례로 영화산업에 뛰어들었을 때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 듯 보였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투자·배급사의 힘은 어떤 제작사와 장기 투자계약을 맺었는가에 따라 결정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투자·배급사는 자기들이 포섭한 제작사의 라인업을 바탕으로 힘싸움을 펼쳤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접어들면서 관계는 역전됐다. 오랜 기간 손실을 겪었던 투자·배급사는 투자기준은 높이는 대신 투자비율은 낮췄고, 자본기반이 없는 제작사들은 속절없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 와중에 싸이더스FNH는 유통 진영에 굴복되지 않는 콘텐츠 진영의 마지막 보루처럼 보였다. MK픽처스, 태원엔터테인먼트 등이 중소형 제작사로 돌아간 뒤에도 싸이더스FNH만은 자체 라인업을 갖춘 유일한 제작사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개편은 그 보루마저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산업적 변화는 단지 비즈니스 차원에서만 의미를 갖는 게 아니다. 최근 만들어진 <과속스캔들> <7급 공무원> <그림자살인> 같은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유통 진영의 힘이 크게 느껴진다. 이들은 모두 비용 대비 효율이 좋은 안정적 장르영화이며, 잘 만든 상업영화다. 물론 이는 긍정적인 일이다. 볼 만한 상업영화가 시장의 다수를 차지해야 영화산업이 안정된다는 데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유통 진영의 독주는 바람직하지 않다. 유통 진영이 주도하는 영화는 평균적이며 보편적이며 안정적일지는 몰라도 ‘시장성’이라는 차원 너머로 나아가기는 쉽지 않다. 일부 프로듀서들의 무모할 정도의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한국영화가 이 정도 자리에 올 수 있었을까. 콘텐츠 진영이 유통의 ‘시다’가 돼도 창의적인 영화가 만들어질까. ‘콘텐츠가 미래’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의 고견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