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제목이 <꿈속의 미래>다. 재미있을까? 옆자리에 50대 서양인이 앉았다. 갑자기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관람 중에 졸던 제천영화제 서양인 심사위원 말이다. 웬걸, 이 아저씨도 영화 시작 5분 만에 코를 곤다. 30여분간 아주 푹 주무신다. 신경이 쓰여 자꾸만 힐끗거렸다. 나중엔 자다 깨다를 반복하더니, 영화 후반쯤에야 정신을 차리고 스크린을 응시한다.
전주에서 4박5일을 보냈다. <씨네21>의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일간지(데일리)를 만들었다. 낮에는 영화를 보고 밤에는 데일리를 편집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실은, 나도 영화를 볼 때마다 하품을 했다. 데일리 편집 마감이 밤 11시쯤 끝나는 터라(이후 뒤풀이는 새벽까지?) 잠이 충분하지 못했다. 물론 존 적은 없다. 그럼에도 내가 본 영화들은 대개 너무 진지해서 수면을 유혹했다.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분쟁국가의 암울한 현실이 투영된 작품들 위주로 골랐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꿈속의 미래>는 타밀 반군의 무장투쟁으로 스산한 스리랑카 사회를 보여준다. 정치인을 암살하고 몸을 숨긴 두 젊은이는 태평하게 이탈리아행을 꿈꾼다.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최후에 가슴이 아렸지만, 나는 극장을 나온 뒤 태평하게 스리랑카 여행을 꿈꿨다.
그보다 먼저 본 <레일라의 생일>은 ‘팔레스타인판 <멋진 하루>’였다. 전직 판사인 택시기사의 지독하게 꼬이는 하루를 통해 감독은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팔레스타인의 속살을 드러낸다. 우울하게 흐르던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놀랍도록 멋졌다. ‘조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할지라도 결코 유머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듯한 영화였다.
상대적으로 덜 졸리는(!) 영화는 마에다 데쓰 감독의 <돼지가 있는 교실>이었다. 이건 우리집 초등학생 꼬마들에게 미안한 영화였다. 어린이날 함께 보면 딱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그날인 5월5일 아빠 혼자 출장와서 감상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돼지를 키우며 나중에 이를 잡아먹을지 말지 고민한다는 소재도 흥미롭지만, 사랑과 성장과 민주주의에 관하여 꼬마들에게 유쾌한 울림을 선물하는 작품이었다. 어린 자녀를 둔 독자라면 국내 개봉 때 꼭 함께 관람하기 바란다.
처음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여하면서, 어린이날의 빚을 갚을 계획을 세웠다. 나중에 고교생이 된 아이들과 이 소도시의 아늑한 영화제에 ‘놀러 오는’ 것이다. 나는 회사를, 아이들은 학교를 사나흘 정도 땡땡이치고! 전주의 맛집을 돌며 평소 만나기 힘든 여러 나라의 영화들을 접하는 문화적 경험은 며칠치 학교 수업보다는 더 값질 것 같다. 아이들이 아빠랑 안 놀아주겠다고 할 확률 99%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