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렌카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유형의 여인이었다. 만약 다른 여자의 경우였다면 사람들의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웬일인지 올렌카를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 속의 두 문장이다. 귀여운 올렌카에게 우주의 중심은 사랑하는 남자에 따라 변한다. 극장주와 결혼하고는 연극에 미치고 목재상과 재혼하자 연극은 까맣게 잊고 나무박사가 된다. 남편이 죽고 유부남 수의사에게 마음을 빼앗기니 가축에 빠져들고, 고향으로 떠났던 수의사가 가족을 데리고 이웃으로 이사오자 나이 든 올렌카는 속도 없이 그의 어린 아들에게 넋을 잃고 모정을 쏟는다.
배우 김혜자는 올렌카를 닮았다. 몰입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이 순간 끌어안고 있는 작품, 지금 끌어안고 있는 굶주리고 깡마른 아이들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한국의 어머니’란 칭호를 스스로 쑥스럽게 여길 만큼, 그녀는 대본을 손에 쥐면 사방의 요동과 소음으로부터 자기를 단절시키며 살아왔다. 김혜자의 작고한 남편은 아내에게 “당신은 혼자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결혼을 해서 이렇게 부대끼는 거요. 음식 안 주면 고대로 앉아 굶을 사람이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외출을 성가셔하고 일 없는 날이면 방 안에서 홀로 우두커니 시간과 노는 그녀가, 힘든 연기에 몸을 던지고 도움이 필요한 저개발국 아이들을 찾아 지구 곳곳을 헤맬 수 있는 까닭은 아마도 그 두 가지 일에 몰두하는 동안은 자기를 깡그리 잊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혜자의 오랜 친구인 두통도 그때만큼은 신통하게 잠잠해진다.
최근 김혜자의 외곬 심장을 점령한 것은 <마더>의 가련한 엄마다. 영혼을 팔아도 아깝지 않은 아들 도준의 살인혐의를 벗기기 위해 지옥까지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달려가는 그 여자. <마더>를 찍는 동안 김혜자는 두통약을 찾지 않았고 엄습하는 배고픔에 거의 난생처음 식사시간을 먼저 물었다. <마더>의 주인공 혜자는 엄마라고 쓰고 어미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 인물이다. 어미는 징그럽고 독하고 때로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봄날의 양지처럼만 보이는 엄마라는 이름 속에는 이기적 생존본능과 종족보존 욕망의 끝이 매복해 있다. 봉준호 감독이 참조한 김혜자의 전작이 MBC 특집극 <여>라는 점도 시사적이다. <여>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유괴한 아이를 친딸처럼 애지중지 키우다가 발각되는 처절한 드라마다.
김혜자는 예민해서 압도적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풍경(風磬)처럼 미풍에도 울린다. 창호지처럼 섬약한 음색은 흥분에 곧잘 뒤집히고 회한에 찬 니오베의 표정을 하다가도 히스테리컬한 비명을 지른다. 각본이 설득력있는 맥락만 잡아주면 그녀가 감당 못할 감정의 낙차는 없다. 특집극 <홍소장의 가을>에서 은퇴한 파출소장의 아내로 분한 그녀는 어깨가 처진 남편과 평상에서 소주를 홀짝이다 기습 키스를 한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고개를 돌려 울컥인다. 일관성없는 것이 김혜자 연기의 일관성이다. 몰입에서 또 다른 몰입으로 옮아가기 때문이다. 사람의 동공은 거짓말을 못한다는데, 인터뷰를 위해 비 내리는 창가에 마주 앉은 그녀의 먹빛 눈동자 안에는 수시로 별이 떴다. 이어지는 문답은 ‘안단테 칸타빌레’로 읽어야 한다. 김혜자의 말투에 맞추어, 조금 느리게, 노래하듯이.
-이번 주일은 온통 흐리고 비만 내리네요. 전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힘들었어요. =맑은 날이 좋아요? 저는 너무 화창한 것보다 이 정도 날이 좋아요. 그냥 자면 되니까. (웃음) 화창한 날은 누가 뭐라고 안 그러는데도 마음이 시끄러워져요.
-선생님 댁 앞에 꽃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더 왁자할까요? 꽃이 많이 피었죠? =나는 살구꽃 필 때가 좋아요. 커다란 나무에 조그만 꽃들이 자욱하게 서려서 멀찌감치 보면 분홍이 연하게 떠올라요. 한 2, 3일 행복하게 해주고, 우리가 모르는 미풍에도 후룩 져요. 무게도 안 느껴질 듯한 자그마한 새가 앉아도 떨어지죠. 눈송이보다 더 가벼운, 쬐끄만 나비들이 내려오는 것처럼. 지금은 라일락이 한창이에요. 담 밖으로 가지가 나도록 라일락을 많이 심었어요. 우리 집 앞 지나는 사람들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요. 행인들이 가지를 꺾어가기도 해요.
-서교동에서 오래 사시다가 현재 집에서도 10년 넘게 사셨죠. 한곳에 마음을 두면 쉽게 옮기지 않는 편이십니까? =변화를 별로 안 좋아해요. 새로운 사람 사귀는 것도 쉽지 않아요. 서교동에서 20년 넘게 살았는데 자동차 통행이 많아지면서 밤에 끼익 하고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나면 “누가 죽었을까?” 두근거리고 불면증이 생겼어요. 병이 날 것 같아 다른 골목으로 이사했는데 집 앞에 5층짜리 오피스텔이 서더라고요. 우리 마당을 내려다볼 것 같아 싫었는데, 글쎄 그 오피스텔의 한 방이 봉준호씨가 속한 연세대 영화동아리방이었대요. 정원에서 내가 강아지랑 노는 것도 보고 담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네요. (좌중 웃음)
-<엄마가 뿔났다> 찍는 동안 몸이 편찮으셨고, <마더> 촬영 마치고도 코피를 흘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후유증이 있으신가요? =<엄마가 뿔났다>와 <마더> 사이 시간이 일주일뿐이었어요. “선생님 충분히 쉬시다 몸이 괜찮으시면 촬영해요. 저희는 다른 장면부터 먼저 찍고 있을게요.” 그랬지만 찍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쉰담? (웃음) 아플 새가 없었어요. 봉 감독이 <마더> 이야기를 5년 전에 처음 꺼내고 잊어버릴 만하면 전화를 하고 연극할 때 찾아오고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그 여자를 끊임없이 나한테 심어줬어요. 하도 오래 그러니까 마치 영화 다 찍어 개봉까지 하고 나한테서 다 흘러가버린 일처럼 생각될 정도였죠. <마더>의 혜자가 이미 내 안에 그렇게 있었고 감독이 내 안에서 그 여자를 계속 자라게 만들어줘서 일주일 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촬영에 들어갔는데, 저는 이번에 우리 산하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어요. 먼 나라는 가도 우리나라 구석구석은 가본 적이 없었거든요. 피로가 있었다 해도 치유를 받았어요.
봉준호 감독의 ‘5년 구애’
-봉준호 감독님은 젊은 분인데도 노련하고 집요하시죠? =영화가 들어가기 기다리는 몇년 동안 내가 “난 자꾸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어떻게 서른도 안된 아들의 엄마로 보이겠냐. 내게 말 꺼낸 것 때문에 무리하지 말아라. 나는 당신처럼 젊고 유능한 감독이 나랑 일하고 싶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죠. 나중에 다른 분께 들어보니 나한테 그런 말을 들은 날은 영화사 들어가서는 머리를 쥐어뜯고 그렇게 힘들어했다네요. (폭소) 난 사람 많은 데를 싫어해 극장에도 가지 않거든요. 남들 다 본 영화를 1년 뒤에 비디오로 보는데 <살인의 추억>도 비디오로 보고는 “어머, 꼭 옛날에 본 근사한 불란서영화 같으다” 했죠. 그런데 우연히 만난 백지연씨가 봉 감독 인터뷰를 했는데 1시간 내내 제 이야기가 절반이었다고 전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또 극동방송 <김혜자와 차 한 잔을>이라는 프로그램을 함께하는 작가가 신문 기사를 오려왔는데 큰 글씨로 “김혜자 선생님과 일하고 싶어”라고 써 있었어요. 배우로서 얼마나 행복하던지.
-구애가 전해질 때까지 말을 뿌리고 다니셨네요. <서동요>의 서동이 선화 공주를 얻은 전략과 비슷한데요. (웃음) <마더>에는 엄마가 신들린 듯 춤을 추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대목에서 영화의 느낌이 확 왔을 것 같은데요. =봉 감독이 직접 가르쳐줬어요. 별 춤을 다 춰 보이더라고. 그중엔 겨드랑이 털 뽑기 춤도 있었어. (시범을 보인다. 좌중 폭소) 대학 때 농활 가면 아주머니들이 일 끝나고 막걸리 먹고 춤을 췄대요. 젊은 봉준호씨는 나가떨어지는데, 아줌마들은 어찌나 에너지 안배를 잘하는지 슬쩍슬쩍만 움직이다 또 막 격렬하게 추다가 하면서 몇 시간이고 지치질 않았대요. (웃음) 나중에 영화사에서 관광버스 태워줘서 아줌마들 춤추는 것도 구경했고 같이 탄 봉 감독, 스탭들도 다 나가서 나 구경하라고 추어보였어요. 그렇게 춤사위를 익혔고, 촬영할 때도 혼자 추기 멋쩍어서 앞에 있는 스탭들도 다 같이 춰달라고 부탁했지만 정작 연기하면서는 그분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봉준호 감독님은 <마더>를 소개하면서 가족 안의 네 가지 관계- 모자, 모녀, 부자, 부녀- 가운데 모자 관계가 갖는 특별함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슬하에 아드님, 따님을 다 두셨는데 어떻게 느끼세요? =봉준호 감독이 툭툭 던지는 말들 가운데 내가 깊이 생각해야 말들이 있어요. “선생님, 아들은 자기 뱃속에서 열달을 키워서 내보낸 이성이지요?” 이래. 듣고보니 진짜 그렇구나. 이성이구나 싶었어요. “딸 하곤 다르지요?” 하더라고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그리스 비극을 연상했어요.
-확실히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감독이 생각하면서 썼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시나리오 많이 돌리지 말라고 그랬어요. 굉장히 숨은 얘기가 많은데 표현이 심플하니까 대본만 읽은 사람은 잘 알아차리지 못할 거 같아서 그랬어요.
-흔히 <마더>에 관해 이야기할 때 “김혜자 선생이 보여준 어머니상과 상반되는”이라는 구절을 쓰는데, 어머니에 대한 통념이, 초인적 희생과 무조건적인 유대를 뜻한다면 <마더>의 마더는 그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 극단까지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요. =규정짓는 걸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 싶어요. 엄마의 본성은 똑같아요.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건 아버지도 아니고 엄마뿐이라잖아요? 엄마의 본질은 같은데 그 엄마가 처한 상황 때문에 어떻게 모성을 표현하느냐가 다른 것이지 변신이고 뭐고 없어요. 엄마 연기가 참 어려워요. 누구나 엄마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역이거든요. 엄마를 다르게 하려면 그를 다른 상황 속에 가져다놓는 시나리오가 있어야지 배우가 무슨 가면을 쓰고 나올 수도 없고요. (웃음) 실제 드라마 안에서도 엄마 역은 힘들어요. 비중이 많은 날은 아주 파김치가 돼요.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챙겨야지 남편 시중들고 손자들도 돌봐야지 부엌 들락날락해야지.
<마더> 시나리오 받고 그리스 비극 떠올려
-혜자는 착란에 가까운 모성의 상태를 보여주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내 살이 네 살이고 네 살이 내 살인 경지랄까요. =전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 여자는 근본적으로 삶이 불안한 여자야. 그래서 항상 눈이 평화롭지 않을 거야. 첫 장면부터 불안하게 아들을 지켜본다고 써 있거든요. 보통이라면 눈앞에서 친구와 노는 아들이 불안할 필요가 어디있어요. 영화에 나오지 않는 그 여자의 남편에 대해서 상상도 많이 했는데, 결론은 어떠해도 좋다는 거였어요. 아주 사랑한 남자였어도, 아니면 도준이가 겁탈당해 낳은 아이라도 상관없어요. 그저 도준이가 그 여자 속으로 낳은 아이이고 목숨처럼 알고 키운 애다, 남편이란 그애를 낳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만 생각하기로 했어요.
-영화와 TV가 여러 차이가 있지만 일단 크게 보이잖아요? <마더>의 홍경표 촬영감독께서 이번에 선생님의 눈과 얼굴을 잘 표현하려는 목적으로 특수한 렌즈(아나모픽 기종 HAWK 렌즈)를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모니터를 통해 전에 보지 못한 본인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나요? =무안해서 모니터 안 볼 때도 있었는데, 길이나 벌판에서 찍다보니 모니터 있는 천막 안이 따뜻해서 보게 됐어요. (웃음) 원래 내가 걱정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감독은 상관없다고, 보이는 대로 찍겠다고 했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봉 감독 말을 이해했어요. 아주 할머니가 되면 곤란하겠지만, (살짝 웃으며) 지금도 할머니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다. <마더>는 그리고 저 엄마가 도대체 몇살인지 따질 겨를이 없는 영화니까요. 그런데 어떤 장면에선 정말 내가 봐도 깜짝 놀라게 늙어보이는 거예요! (폭소) 어머, 이게 뭐야 그랬다니까요. 나이 먹으면 윤곽이 허물어진다잖아요. 고개를 기울이는 장면이 있는데 난 너무 충실하게 수그린 거야, 그걸 그대로 찍었어 세상에, 자기들은 영화가 어떻다는 걸 잘 알면서 좀 귀띔이라도 해주지, 나쁜 사람들이야. (웃음)
-어린 시절 살던 집이 영화 촬영을 할 정도로 크고 손님이 많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으신가요? =지금 퇴계로와 서울역이 통하는 길이 우리 집이었어요. 거실이 한 200평쯤 됐어요. 부자여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미 군정 시절 재무부 장관에 해당되는 일을 하셔서 살게 된 사택이었어요. 만날 손님들이 와서 파티를 했고, 공원인 줄 알고 놀러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어요. 영화 촬영은 아마 식구들이 배우 구경하려고 빌려줬을걸요? 서양 사람들이 만날 모임에 와서 “닥터 김!”하고 아버지를 부르던 소리, 부부동반 댄스 파티의 음악소리, 그 음향들만 기억이 나요.
-김혜자 선생님과 어머니라는 개념이 가깝다보니 선생님의 어머님에 대한 기억도 궁금합니다. =어머니는 열아홉살에, 열일곱 아버지에게 시집왔어요. 딸 둘 낳고 아버지가 훌쩍 유학을 떠나 17년 만에야 돌아오셨고 그 다음에 제가 태어났죠. 유학 떠나던 날 “냉수 한잔 주시오” 해서 남편과 흘깃 마주친 눈길 하나의 기억으로 그 시간을 견디셨대요. 어머니는 무척 미인이셨어요. 친가가 전북 군산의 거상이었는데 사랑방에 하도 손님이 들락날락하니까 아침마다 상을 열여덟번 차렸대요. 딸 둘 키우랴 살림하랴 외로울 새가 없어 버티셨겠죠.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 폐결핵에 걸려 선교사들이 세운 대전의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의사인 총각 선교사가 우리 엄마에게 반한 거예요. 정식으로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결혼하고 싶다는 말까지 나왔대요. 어머니는 말을 모르니 그저 그가 들어오면 돌아눕기만 했대요. 집에서 그 일을 알고 부랴부랴 퇴원시켰죠.
-선생님이 보신 것은 아버지가 돌아오신 뒤의 어머니 모습이셨을 텐데 행복해 보이셨나요? =힘든 세월을 보내셔서 그런지 아버지가 오신 뒤에도 그리 활짝 웃는 모습은 못 봤어요. 늘 아프셔서 엄마를 생각하면 “아유 머리야…” 하는 소리를 제일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제 두통이 엄마를 닮은 거예요. 우리 엄만 왜 저리 머리가 아프고 얼굴이 흴까 생각했죠. 저는 17살 터울의 언니 손에서 거의 자랐어요.
-어머니 미인이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마요네즈>에 잠깐 나왔던 젊은 시절 선생님의 사진이 생각납니다. 소녀 시절부터 서구적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으셨을 것 같아요. =우리 남편이 그랬어요. 예쁜 외국 배우,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다 나 닮았댔어요. 킴 노박도 닮았고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나랑 똑같고 오드리 헵번, 잉그리드 버그만도 다 닮았다고. 저야 아무도 자기 말 곧이 안 들을 거라고 웃었지만. 어려서는 예쁘다는 소리보다 눈동자가 머루 같다는 어른들 말씀을 들었어요. 그래서 내 눈빛이 다른 사람과 좀 다르구나 하긴 했죠.
-어느 명상가가 전생에 인도 공주였다는 말도 했다고 읽었습니다. 혹시 내생이나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소녀였나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을 거예요. 환경 때문이었는지 타고난 성정 때문인지는 몰라요. 항상 죽음이 크게 두렵지도 않고 사는 게 좀 지루하지 않나 싶었어요.
사교의 장이었던 옛집, 그리고 어머니
-집이 그토록 넓었는데 자매들과 터울도 크고 혼자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혼자 노는 데 최고 친구는 책이었어요. 그 습관이 안 버려져서, 큰애가 자라 품을 떠난 뒤엔 불현듯 ‘아 내겐 음악과 책과 커피만 있으면 아무도 없어도 돼’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에그머니나, 진짜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어째. 남편도 아이도 잃고 무슨 죄를 받으려고. 어머, 하나님 지금 한 말 잊어주세요’라며 기도하고 그랬죠. (웃음)
-실제로는 일을 할 때는 모성의 스위치를 딱 끄고 집안일과 거리두기를 하시는 스타일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TV 아침 토크쇼에 아드님과 출연하셨는데요. =으응, 김치? (김혜자 선생의 이름을 딴 김치를 소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마음속에 그 기억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그냥 빨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좌중 웃음)
-프로그램에 나와서도 터놓고 말씀하셔서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아닌 척하는 머리는 못 굴려요. 아들이 제 이름을 붙인 김치사업을 한다고 해서 지난해 내내 날 얼마나 울렸는지 몰라요. “넌 왜 엄마를 배우로만 살게 못 해주니. 딴 사람들한테도 물어보니까 모두 ‘아이 아들이 나쁘다 진짜’ 전부 이런다. 내 이름 안 넣으면 사업 못하니?” 그러면 “엄마 알았어, 울지마, 안 할게” 그래놓고는 3개월 뒤에 다시 어디까지 추진됐다고 말을 꺼냈어요. 그래서 <엄마가 뿔났다> 하는 동안 더욱 지쳤을 거예요.
-보기에도 아드님이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던데요. =그러다 생각했어요. 저는 평생을 엄마가 아니라 배우로만 살았고 연기가 나의 전부였어요. ‘한국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부끄럽죠. 아들이 언젠가 그랬어요.“엄만 이상해. 엄마가 뭔가 하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것이 엄마 주위에 둘러쳐져요. 그래서 더이상 가까이 갈 수가 없어요.” 내가 커다란 상처를 입히진 않지만 아주 잘고도 깊은 상처를 주었겠구나 싶었어요. 아들이 자라는 동안 저는 아들이 뭘 하는지 별로 관심도 없었죠. 김남조 선생님의 <자책과 놀며>라는 시가 있는데, 저의 자책에는 그것이 포함돼요. 결국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요. 나쁜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또 먹어보니까 맛이 있더라고요. (폭소) 홈쇼핑에 나가 선전하면 금세 판매고가 오른다는데 우리 아들도 그런 부탁까진 절대 안 해요.
-선생님은 “나 좀 내버려둬라”하는 한편, 남들에게 나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스타일이신 것 같습니다. =나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 혼자 내버려둬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아프리카며 아시아의 가엾은 아이들을 찾아다니는지 내가 날 이해못하겠어요. 그 아이들은 제가 예뻐해주고 그애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이곳에서 맺는 인간관계는 나한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해요. 연기 외에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은 상황이 싫어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평화스러워요. 한끼 밥만 먹어도 행복해하는 아이들이 있고, 거기는 본질적인 것만 있어요. 사람이 약간 고독을 즐기는 면도 있잖아요? 그런데 ‘아 이것이 절대고독이구나’라고 느끼는 시간이 드물지만 있어요.
고독과 평화는 다르지 않다
-공포와 비슷한 느낌인가요? =아뇨. 저는 뭐든 공포스럽지는 않아요. 내가 바랄 수 없는 걸 바라고 있음을 느낄 때 고독해요. 도저히 안될 일을 꿈꾸고 있다고 깨달을 때 너무너무 고독해.
-선생님은 머리가 아프고 복잡하면 어떻게 해결하세요? =<마더> 촬영하면서는 신기하게도 두통약을 먹지 않았어요. 가엾은 아이들을 보러 갈 때도 안 아파요. 팔랑개비 같은 경비행기 타면 다른 승객은 구토하고 그러는데 나는 좀 띵할 뿐이에요. 식구들은 위험하다고 걱정하지만 전 겁도 안 나요. 한번 죽는 건데, 아이들 만나러 가다 죽는 것도 괜찮지 않나 하면서 다녀요.
-언제 떠나도 상관이 없다는 마음이신가요? 뭘 더 정리해놓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으시고요? =최근에 유서 써놓았어요. (웃음) 애들이 말 안 들을까봐 인감도장도 찍어놓고 사인도 했어요. 내가 아프거나 사고가 나 즉사하지 않으면 한달 동안 병원에 넣어두고 실컷 봐라, 그러나 그 이상 인위적인 생명 연장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안 해주면 너희 정말 불효야, 라고 썼어요.
-선생님께서는 연기하지 않을 때는 에너지를 가둬두고 약간 나른한 상태로 지내실 것 같습니다. =나는 정말 널브러져 공상을 해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제 책의 추천사로 박완서 선생이 “김혜자는 연기를 하는 시간 외에는 널브러져 있을 거다”라고 쓰신 걸 보고 깜짝 놀라 전화를 드렸어요. “선생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그랬더니 “내가 그러거든요” 하시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방심해 있는 와중에도 연기를 위해 감정을 기억하거나 새겨두시는지요? =제가요, 좀 이상해요. 어느 날 걸레질을 하면서 내가 예전 좋아했던 사람이 결혼을 하는 날이라면 생각했어요. 이제 시작했겠네, 지금쯤 식장에 걸어들어가겠지, 그러면서 걸레질하면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더라고요. 그런데 그 와중에 내가 지금 어떻게 눈물을 떨어뜨리고 무슨 표정을 짓는지 스스로 살피고 있더라고요. 기억하려 굳이 안 해도 그런 것들이 저장돼요.
-천직이라는 것이 그런 걸까요? =그런데요. 나는 직업란에 ‘탤런트’라고 쓰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아, 저이는 저걸 직업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러면서 놀라요. 난 한번도 연기가 직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그걸 직업이라고 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해요. <마더>의 엄마가 도준이한테 “너는 나야”하듯이 연기는 나예요. 숨쉬는 것처럼.
연기는 숨쉬듯 자연스러운 것
-연기 경력의 시작이 특이하세요. 유치원 다닐 때 주일학교 선생님 추천으로 세브란스 의전 학생들의 연극 공연에서 아역을 맡으셨다면서요. =개에게 물려 공수병 걸려 죽는 아이를 연기했어요. 극중 이름도 혜자였는데 마지막에 “물, 물” 이러면서 죽어가는 연기를 하니까 객석의 아줌마들이 “혜자를 죽이지 말라”고 아우성을 치고 난리였대요. 우리 언니는 그때부터 제가 배우가 될 줄 알았다고 했죠.
-대학 2학년인 21살에 데뷔해 KBS 공채 1기 탤런트로 뽑혔는데 연수 졸업 작품 드라마 한편을 하고 연기생활을 곧장 그만두셨어요. 대체 얼마나 큰 좌절을 경험했기에 오랫동안 추구했던 목표를 딱 포기하고 돌아섰을까 상상이 안 갑니다.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말도 있는데요. =(딱 잘라) 난 그런 말 몰라요. 그런 말 좋아하지도 않고. 첫술에 배부를 수도 있지 왜 없어요? 너무나 열망이 강했기에 실망도 컸던 거예요. 빨리 잊어버리고 도망가고 싶었어요. 결혼은 어찌 보면 탈출구였죠. 배우가 되겠단 생각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싶었어요. 아무 준비없이 열망만 가득했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 그래요 수치심이었죠.
-결혼생활을 하다 다시 연기자로 돌아오신 계기가, 아드님이 네다섯살이 되어 엄마보다 친구를 찾기 시작하자 서운해서였다고 들었습니다. 보통 엄마들은 아이들과 분리되는 아픔을 이르면 취학연령이나 10대 사춘기 때 느끼는 것 같은데, 얼마나 몰입하셨기에 일찍 그런 배신감을 느끼셨을까 싶어요. 아드님 입장에서는 “다섯살 때 네가 나랑 안 놀아줘서 그랬어”라고 추궁받는다면 억울할 거 같아요. (웃음) =용서가 안되는 거예요! 놀다가도 중간에 젖 먹고 나가서 놀던 애가 어느 날부터 젖도 잘 안 먹더니 친구가 놀자면 미련없이 나가는 걸 보며 “아니 저럴 수가 있나” 싶고 너무 고독해지면서 연기가 다시 생각난 거예요. 어릴 적부터 꿨던 꿈을 어거지로 치우다시피 지워버렸기 때문에 한번 되살아나니 너무 강렬한 것이, 속에서 소용돌이가 쳤어요. 그런 차에 우연히 연극하시던 경기여고 권영주 선배와 마주쳤어요. 그분이 연극을 하면 연기의 기초를 배울 수 있다고 권했고 덕분에 연극을 시작했어요. 자유극장에 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허규씨가 제가 배우가 될 성싶어 보이셨는지 극단 실험극장으로 데려갔어요. 그분으로 인해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따라 음악이 달라지는 걸 알았어요. 마당극을 누구보다 먼저 시작한 분인데 연기연습을 할 때 북으로 장단을 맞추시면서 가르쳐주셨어요. 3년 동안 연극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MBC가 개국하면서 스카우트됐어요.
-방송에 대해서는 최초에 좌절했던 기억이 있고 연극에서 한창 신명이 나셨을 텐데요. =그때는 연기에 자신이 붙은 거예요. 연극계에서 백성희 선생, 나옥주씨 계보를 잇는 배우가 나타났다는 평판까지 듣는 스타가 됐거든요. 둘째인 딸을 임신한 채 <개구리 남편>이라는 드라마를 시작했는데, 저를 쓰려고 극중 인물도 임신한 걸로 설정해서 배가 부르는 과정과 병원에서 퇴원하는 모습까지 찍었어요. 해산하고 사흘 만에 겨울에 야외촬영을 나가는 저를 보며 시어머니가 걱정했던 기억이 나요.
-42살에 첫 영화 <만추>를 하셨습니다. 정사장면도 포함돼 있고 여러모로 상당한 결심이 필요했을 듯합니다. =내가 읽은 시나리오에는 키스신과 정사 치르고 나서 풀밭에서 우는 장면뿐이었어요. 그래서 완성된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내 몸이 가냘픈데 가슴이 이렇게 큰 대역을 써서는…. 많이 실망했어요. 마닐라영화제에서 주연여우상을 안 받았다면 잊었을지도 몰라요. 감독님이 봉준호 감독처럼 5년 전부터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해주신 것도 아니고, 촬영 끝날 때쯤에야 겨우 친해졌죠. 하지만 촬영 초에는 “네가 TV에서 톱이라고 여기서도 그런 줄 알아?” 하며 본때를 보이려는 기색이 느껴졌어요.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자주 선생님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특히 단편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서 글 쓰는 아내를 평생 감싸고 돕던 온화한 남편의 모습과 남편이 암에 걸린 뒤 나날의 묘사를 보면서 어쩌면 김혜자 선생님도 이렇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건 드라마 속 내 이미지 때문에 그럴 거예요. <어떤 나들이>라는 박완서 선생의 단편이 있는데 알코올 중독자인 여자가 나와요. 찬장 안 참기름병, 깨소금 병 뒤에 소주병을 감춰두고 남편만 나가면 술 먹을 생각에 신바람이 나서 청소를 해요. 그 다음에 의식을 치르듯 소주를 꺼내먹고 외출을 하는데 다리 밑을 지나가는 차들이 다 자기를 호위하는 것처럼 느끼는 장면의 표현이 정말 탁월해요.
-어머니 역을 많이 하셨는데 첫째 누구누구의 엄마인 주변인물이라기보다 엄마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많이 하셨고 둘째로 선생님이 연기하신 엄마들은 어쩌다보니 전업주부로 살았지만 기회만 있었다면 예술가가 됐을 것 같은 감수성과 기질의 여성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작가들이 나를 보면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으니 그렇겠죠? 김정수 작가는 언젠가 “김혜자 선생 가슴에는 폭발만 안 했지 화산이 하나 들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전원일기>에서도 속상하면 혼자 광에 가서 아버지가 남긴 소주 홀짝거리면서 어떻고 저떻고 이야기하는 여자였죠. 그렇게 김정수씨가 집필한 10년 동안은 그 엄마의 공간도 만들어주고 했는데 바뀐 작가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만날 엄마는 “들어왔니?, 밥먹었니?”만 했죠. 그러다가 결국은 시청자가 외면했죠. 하지만 처음 10년의 기억으로 <전원일기>는 지금도 좋은 드라마로 남아 있어요.
-김수현 작가와 많은 작품을 같이 하셨습니다. 두분 사이의 신뢰가 클 것 같은데요. =김수현씨는 정말 독보적인 사람이라는 점을 세월이 갈수록 절감해요. 녹화가 끝나고 기진맥진해서 나오면 다음 책이 딱 나와 있어서 사람을 질리게 해. (웃음) 사람 마음을 그렇게 신랄하고 폐부를 찌르게 표현하는 사람은 없어요. 요새는 연출들이 그림으로 많이 표현하니 대사가 좀 많게 보일지 몰라도 원체 그 작가의 스타일이니까요. <엄마가 뿔났다>가 애초에는 처음에는 한자가 이혼하는 설정이었어요. “좀 심한 것 같다”고 말했죠. 집을 나가는 것도 착한 남편을 봐서라도 그냥 살 수 있을 것 같아 “문제가 없잖아”라고 말했더니 김수현 작가가 “난 문제가 없는데 나가고 싶어하는 여자를 그리려는 거예요”라고 잘라 말하더라고요. 내가 어리석은 얘길 한 거지.
-한자가 마침내 원룸을 얻어서 트럭을 타고 이사나갈 때 차창 밖으로 팔을 뻗어 바람을 느끼고 하늘을 향해 까르르 웃는 얼굴이 그렇게 화사하고 예쁠 수가 없더라고요. =아휴, 진짜 너무너무 좋았어요! 세트장에 내 오피스텔 세트와 가족들이 사는 집 세트가 같이 있었는데, 가족집 세트쪽은 보지도 않고 오피스텔쪽만 보고 다녔다니깐요. (웃음) 혼자 산 오피스텔 세트는 내가 많이 꾸몄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그냥 협찬 들어온 맞지 않는 가구가 들어올 판이었어요. 하루는 명화가 그려진 에어컨을 넣는다기에 그 여자가 무슨 돈이 있어 그런 걸 샀겠냐고 창고에서 제일 낡은 에어컨 갖다달라고 했어요. 방송국 굴러다니는 무협지 만화가 꽂혀 있기에 우리 집에 있는 책을 트렁크로 실어다 꽂았어요. 근데 그랬더니 자기네 책 부탁한다는 전화가 어찌나 많이 오는지. (한숨)
-연기하는 공간에 대해서 상당히 신경을 쓰시는군요. =나는 내 뒤에 뭐가 있는지가 굉장히 중요해요. 배경이 역할에 도움을 주니까요. <마더>에선 딱 한 가지 이야기했네요. 도준 방에 들어갔더니 무슨 쌍팔연도 방 같았어요. 연대가 지금부터 3, 4년 전이고, 도준이도 좀 모자라서 그렇지 피끓는 청년인데 좋아하는 축구선수나 배우도 있지 않겠냐고 해서, 박지성인가 누구 사진을 붙였을 거예요.
-보통 가족 드라마에서는 배경이 커다란 장롱일 경우가 많죠. 답답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방송 미술에 약간의 타성이 있어요. 못사는 사람은 이런 것, 잘사는 사람은 협찬 들어온 가구를 넣고 빈 공간을 못 참아서 꼭꼭 채워놓죠.
주인공 역할을 고집하는 이유
-주인공만 고집하신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 설명해주신다면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 뒤에 나오는 할머니가 있어요. 사람들은 내가 주인공 병에 걸렸다고 하는데, “바보들, 난 저런 역 있으면 한다” 그래요. 우리나라 작가들은 몇몇만 빼면 주인공만 제대로 그려요. 개중에는 그것도 못하는 사람도 있고, 나머지 인물은 왜 나왔는지 모르게 해놓는 경우도 흔해요. 그러니까 웬만큼 이야기는 되는 주인공을 하려는 것이죠. 이젠 변명하려고도 안 해요.
-3부작 드라마 <봄날의 미소>는 주인공이 아니었던 작품인데요. 후처의 아들을 입적해서 의지하며 키우는 의붓어머니 역이었어요. 아들의 중병을 알고 병원 쓰레기통을 붙잡고 기우뚱 서 있던 모습과 “나도 데려가”라고 수십번 반복하며 아들에게 떼쓰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작품은 연출자가 어떻게 섭외했었나만 기억나. 입봉하는 PD가 무조건 대본을 놓고 갔는데 무슨무슨 조연출했다는 이력서를 첨부해놓았더라고요. 사흘 뒤 아프리카에 가야 할 일정이어서 안된다고 했지만 찾아오겠다고 했어요. 꽃을 한 아름 사와서는 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거예요. 아들 역은 조재현씨로 정해졌는데 그 사람도 가족여행을 떠난 것을 몽골까지 쫓아가서 섭외했대요. (좌중 웃음) 그래도 거절하고 돌려보냈는데 전화가 왔어요. 우리 집 담 밖으로 넘어간 벚꽃가지를 꺾어갔다고. 그때 해야겠구나 싶었죠. (웃음) (<자매바다> <주몽> <이산>의 공동연출 김근홍 PD다.-편집자)
-<사랑이 뭐길래>에서 선생님이 연기한 대발이 엄마는 피해자 같은 말투로 구시렁구시렁하는데 듣다보면 염장을 지르는 말을 잘하는 캐릭터였어요. 사돈이자 친구 역인 윤여정씨가 “같은 말이라도 니 입에서 나오면 왜 그렇게 고약하니” 했었죠. 그런 얄미운 구석이 실제로 본인한테 있다고 생각하세요? =여순자. 이름도 안 잊혀져. <사랑이 뭐길래>를 할 때 여순자 역과 윤여정씨가 한 역 중에 연출자는 후자를 내가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상식적으로는 그게 맞죠. 난 그냥 보통 엄마를 많이 했으니까. 그런데 읽어보니 그쪽은 상대할 인물이 많아 힘들고 재미없을 것 같았어요. 결국 드라마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 바로 그 배배 꼬인 면이었어요. 진땀을 비질비질 흘리면서 생각했죠. 나한테는 비틀린 부분이 조금밖에 없나보다.
-<풍란>의 문정왕후 역을 제외하고는 사극 출연이 없으십니다. <궁>은 현대극으로 봐야 할 것 같고요. 까닭이 있으신가요? =요즘 사극과 예전 사극은 좀 달랐어요. 문정왕후 역할을 할 때 참 어려웠어요. 작가 선생한테 내가 “옛날 여자들은 정신병자는 없었어요?” 물어봤어요. 종일 목침에 기대 앉았다가 “들어오너라”만 하고. 그도 인간인데 방 안도 서성이고 깨금발로 창문 밖도 바라보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내가 느끼기엔 좀, 인간이 없는 거예요. 어딜 긁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종아리도 안 가려운지 내내 앉아 있으면서 환장할 것 같았어요. (웃음)
-주연하신 연극 <셜리 발렌타인>의 셜리도 그렇고 <19 그리고 80>의 모드도 그렇고 나이와 상관없이 여성성이 꽃피는 인물입니다. 외람되지만 다시 사랑을 하는 상상을 하시나요? =그럼요. 사람한테 사랑은 희망이에요. 사랑이 꼭 남녀간의 사랑만 뜻하지 않지만 그것도 포함해서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못 살 거예요.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최고라고. 그분이 말씀하신 것이 무슨 성스러운 사랑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포함해 사랑이란 이름이 붙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거죠.
아프리카 나온 영화만 보아도 눈물이…
-월드비전 일을 17년째 하고 계십니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스스로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할 텐데요. 종교인이신데 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참상을 자꾸 보아야 한다는 점만 해도 그렇잖아요? =전 지금도 확실하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처음에 갈 때는 그렇게 비참한 줄 모르고 그저 가난한 나라에 여행간다는 마음 정도였어요. 당시 아프리카 여행은 쉽지 않았으니 동물도 많고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죠. 그런데 제가 그렇게 숱하게 아프리카를 다니면서 본 야생동물이라곤 저 멀리서 얼룩말 한 마리 뛰어가는 것 본 게 전부예요. 기근이 심하고 내전이 끝난 직후라 풀도 없고 가시나무만 있는 지역들인데 거기 동물이 왜 오겠어요. 정말 하나님이 이러실 수는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다신 안 가리라 했는데 어느새 정신차려보니 내전소식만 들리면 평소에 보지도 않던 <AFKN> 뉴스를 틀어보고 있더라고요. 알고는 못 갔을 거예요. 이제는 다큐멘터리 등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선생님이 많이 알리셨죠. =아무리 왼손 하는 일,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배우기 때문에 알리는 것이 하나님이 제게 주신 역할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 참 따뜻해요. 큰돈 내놓으라면 도망가지만 작은 돈 보태달라면 낼 준비가 언제든 돼 있어요. 다만, 창구역을 하는 기관의 운영이 미흡했던 거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에서, 품에 안은 아이가 내 몸에 새겨진 검은 문신 같았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의 가벼운 체중과 떼낼 수 없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어요. =너무나 부피가 없고 가벼워요. 맞아요. 떼어낼 수가 없었어요. 떼어낼 수가 없어서 자꾸 다니는 거예요. 애들을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할 일을 방치하는 기분이 돼요.
-대중매체에서 보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소말리아 사태를 찍은 <블랙 호크 다운>을 보며 참 마음이 아팠어요. 감독이 잘 만들었어요. 미군이 흑인들을 무시하고 30분이면 작전 끝이라고 덤볐는데 끝까지 저항하잖아요? 그 사람들에겐 특유의 몸짓이 있어요. 총을 쏠 때 어깨를 이렇게 돌리는 그 몸짓만 봐도 아프리카가 그리워서 눈물이 났어요. (목이 메어) 방글라데시, 인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제가 간 모든 곳의 아이들이 다 예쁘지만 이상하게도 아프리카의 피부 검은 그 아이들이 제일 그립고 예뻐요.
-OBS에서 <김혜자의 희망을 찾아서>라는 토크쇼를 진행하셨습니다. 예민한 분에게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꽤 힘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인터뷰할 분이 오시면 제가 부탁을 했어요. “제가 이런 일 하게 생겼나요? 도와주세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제가 말을 못하고 당황하면 선생님께서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러면 대부분 묻지도 않는데 나서서 먼저 이야기해주세요. (웃음) 근데 나를 그 프로그램에 섭외한 주철환 전 OBS 사장은 어쩔 줄 모르는 것도 내 장점이고, 지루할 때 얼굴에 표나는 것도 매력이라는 거예요. 아유, 하게 만드려고 별게 다 매력이래요.
-프로그램 중 김중만 사진작가와 인터뷰하실 때 선생님이 영정사진을 매년 바꾼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지막에 바라볼 내 얼굴이 어떤 것인가 계속 상상하시는지요? =나는, 모든 사진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신경 안 쓰는 거 같으면서도 굉장히 신경을 쓰나봐. 제일 배우 같고 아름다운 사진이 영정으로 놓여 있었으면 좋겠어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슬픔과 더불어 저 사람을 내가 알았었다는 기쁨을 같이 줄 수 있는 얼굴이었으면 좋겠어요.
追伸 꽃 이야기로 시작한 인터뷰가 굽이굽이 돌아 끝난 뒤, 그녀는 목련의 일화를 빠뜨린 점을 못내 마음에 걸려했다. 뭄바이에 갔을 때 인도의 청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난 탐스러운 자목련이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했다. 그 자태를 기억에서 지우지 못한 김혜자는 자목련 한 그루를 정원 가운데 심었다. 앞집 담이 회색이라 자줏빛 꽃과 제법 어울렸는데 어느 날 이사 온 새 이웃이 담을 빨간 벽돌로 바꾸어버리는 바람에 망했다고 엷은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3층 그녀의 방 창문으로 보이는 제일 높은 가지에 핀 세 송이만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여전히 곱다. 그녀는 이 사태의 교훈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제가요. 느꼈어요. 자목련처럼 고유색이 강한 꽃은 자기 뒤에, 옆에 뭐가 있느냐가 참 중요하구나. 사람도 그렇겠구나라고요.” 김혜자라는 여리고 붉은 꽃을 오랜 세월 지켜준 담과 하늘은, 그 부서지기 쉬운 빛을 알아본 사람들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