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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빈] “나는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이에요”

<박쥐> 배우 김옥빈

김옥빈은 웃음이 헤프다. 어떨 때 웃는 웃음은 정말 ‘껄껄껄’이다. 동작은 크고 활달하다. 남자처럼 털털하고 괴짜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주변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사람이다. <여고괴담4: 목소리>(2005)에서 교실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던 소녀, <다세포소녀>(2006)에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 그리고 세간의 화제가 됐던 ‘된장녀’ 이미지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박쥐>는 또 다른 변신이다. <다세포소녀>에서 이렇게라도 살아야 할까, 이렇게 사느니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했던 소녀가 같은 고민을 전혀 다른 영화에서 하게 됐다. 그렇게 <박쥐>는 이전작들과의 단절이기도 하면서 ‘뭔가 상식적이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매혹이 빚어낸 작품이다.

이제 김옥빈은 칸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게 된다. 그런데 “보통 영화가 끝나면 바로 퍼지는 스타일이라 걱정된다”며 “<박쥐> 촬영 끝나고 오랜만에 스탭들을 만났는데 다들 ‘누구냐 넌’ 그러더라. 영화 끝나고 퍼져서 볼살이 통통하고 그러니까 좀 어려 보여서 태주 딸이냐고 그러더라”며 웃는다. 영화와 달리 그런 자리에서 후덕하게 보이지 않을지 걱정이란다. 그래도 올해가 김옥빈 최고의 해가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다 돌아오길.

-박찬욱 감독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나. =캐스팅 결정 전에 두번 정도 만난 거 같은데, 생각보다 말투가 너무 부드러워서 놀랐다. 섬세하고 여성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느낌이 참 좋았다. 그래서 나와 잘 맞는 감독님이 아닐까 생각했고. (웃음) 현장에서도 뭔가 확신있게 지시를 하기보다는 배우에게 가능성을 열어두는 스타일이다. “그건 그럴 수도 있고” 혹은 “네가 만들어가야겠지?” 그렇게. 배우에게는 자유롭게 갈래를 뻗쳐나갈 수 있게 여유를 주신다.

-태주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요구사항 같은 게 있었나. =있다. 일단 피부가 거칠어야 한다고 하셨다. (웃음) 영화에서 초췌하고 푸석하게 보여야 하니까. 그리고 발 관리는 절대 받지 말라고 했다. 밤에는 맨발로 동네를 막 뛰어다녀야 하니까. 성격이나 스타일보다 그런 외모적인 것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해주신 편이다.

-평탄한 길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밤에 뛰느라 고생했겠다. =사실 나보다 스탭들이 더 고생했다. 아무래도 내가 돌이나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유리 조각 같은 걸 밟으면 안되니까 뛰기 전에 몇백 미터를 일일이 다 청소해야 했다. 그래도 언덕 넘어가면서 돌을 잘못 밟아 아! 하고 쓰러진 적이 있긴 하다. (웃음)

-태주라는 이름은 마음에 들었나. =너무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 옥빈 말고 태주로 살고 싶다. (웃음) 내가 그렇게 이름에 집착 같은 게 좀 있다. 받침없는 그런 이름이 좋다. 어렸을 때부터 옥빈이라는 이름 때문에 너는 뭐 황실의 첩이냐 후궁 같은 거냐고 놀림을 많이 받았다. (웃음) 영문 이름도 ‘옥’ 때문에 ‘오케이 빈’이다.

-영화 속 의상이 무척 다양하다. 그중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의상이 있다면. =일요일에 아르바이트한다고 거짓말하고 병원으로 매주 상현을 만나러 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입는 파란색 원피스가 가장 마음에 든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러 가는 거라 옷장을 열어서 태주가 보기에 가장 예뻐 보이는 옷만 골라서 입고 가는 거다. 얼마나 신나겠나. 게다가 앙큼한 것이 속옷도 안 입고 간다. (웃음)

-<여고괴담4: 목소리> <다세포소녀> <1724 기방난동사건> 등 지난 출연작들이나 <박쥐>까지 평범한 정극 연기는 드물었던 것 같다. 성공 여부를 떠나서 늘 장르적으로 독특한 영화들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다세포소녀> <1724 기방난동사건>은 감독님들이 평소 스타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꾀할 때 하게 됐다. (웃음) 사실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걸 잘 모른다. 배우로서 그게 정상적이냐 비정상적이냐 그런 것부터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 그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냥 시나리오를 받고 작품이 결정되면 영화 속 그 사람이 된다는 게 중요하지. 그러면서 그런 사람이 실제로 우리 주변에 있다고 계속 생각하는 거다.

-게다가 <박쥐>는 노출이나 베드신에 대한 부분도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겠다. =배우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럴 때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반반이다.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그런 장면들이 어떻게 완성될까 하는 기대감인 거다. 게다가 <박쥐>의 태주 캐릭터 같은 경험을 도대체 내가 어디서 해봤겠나. (웃음) 그렇게 <박쥐>는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큰 희열을 줬던 작품이다. 그게 핵심이다.

-어떤 장면이 특히 힘들었나. =김해숙 선생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오달수 선배 목 조르는 장면, 그런 게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이 터졌다. 김해숙 선생님을 제대로 못 때려서 손이 덜덜덜 떨리는 거다. (웃음) 그리고 오달수 선배도 너무 연기를 잘하니까 내가 너무 심하게 졸라서 이러시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 게 무서워서 진짜로 울었다. 계속 죄송하다고 했는데 ‘연기인데 뭘 그러냐’고 그러시더라.

-어쩌면 스탭들을 비롯해 배우들도 ‘박찬욱 사단’이라 할 만큼 짜인 팀인데, 그 속에서 호흡이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특별히 어떤 ‘작업’을 하기도 했나. =일단 나는 내 취미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스타일이다. (웃음) 같이 운동하고 놀러가고 그런 걸 막 강요한다. 근데 박찬욱 감독님, 송강호 선배 둘 다 움직이는 거 싫어하는 분들이라 무조건 ‘싫어’다. 아무리 내가 권유해도 ‘넌 젊으니까 참…’ 그러면서 끝이다. 그래도 촬영현장에서 배드민턴도 치고 그랬다. (옆에 있던 안수현 PD 왈, “송강호 선배를 오래도록 봐왔지만 현장에서 배드민턴 치는 건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렇게 하기 싫어하시더니 일단 시작하니까 승부욕은 대단하시더라. (웃음)

-얘기를 나누다보니 남자와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웃음) 몇년 전 ‘된장녀’ 얘기가 무색할 정도로. 그러고 보니 컴퓨터 고수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일화도 생각나고. =그러게. 난 휴대폰 컬러링도 몇년째 그대로다. 털털하고 뭐든 좀 느린 편이다. 그리고 컴퓨터 조립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원래 관심이 많았다. 당시 내가 어디 회원인가, 가지고 네티즌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웃음) 어떤 기자분이 디씨컴갤이냐, 파코즈냐, 물어본 적 있는데 ‘파코즈요’ 그러니까 놀라시더라. 난 그저 이런 것도 화제가 되는구나, 했었다.

-박찬욱 감독 이전작들 중에서 좋아하는 장면들을 꼽는다면. =먼저 <올드보이> 후반부에서 혜정 언니가 하얀 천사 날개로 날갯짓하는 장면.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러는 게 너무 귀여웠다. 그렇게 생뚱맞은 것들을 좀 좋아한다. (웃음) <친절한 금자씨>는 금자가 미용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하하하하하 마구 웃는 장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송강호 선배가 자기 자식 병원에 있는 거 보고는 오열하다가 다른 집 자식을 보면서는 대조적으로는 하품하는 모습.

-촬영 전 박찬욱 감독과 시네마테크에서 <퍼제션>을 함께 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박쥐>와 연결지을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퍼제션>은 그전에도 두번이나 봤다. 샘 닐도 좋아했고. 그렇게 상식에서 벗어나고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박 감독님과 함께 보면서 이상하게 나랑 웃는 포인트가 비슷해서 놀랐다. 제작실장님은 어떻게 <퍼제션>을 보면서 웃을 수 있냐고 그러시더라. 그런 점에서 감독님과 통한 거지. 영화 속 하인리히가 벽을 막 비비고 문지르면서 움직이는데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나. (웃음) 감정적으로 세기 때문에 사람들 맥을 빼기도 하지만 자꾸 보다보면 <퍼제션>의 유머가 있다. 이자벨 아자니도 종종 너무 웃기고.

-그러고 보면 <박쥐>도 그런 식으로 은근히 웃긴 장면들이 많다. 마네킹처럼 한복 입고 앉아 있는 행복한복집 장면 같은 것들. =맞다. 우리 영화 은근히 웃기다. 손님 하나도 없는 한복집에서 라 여사(김해숙)와 태주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마칠 시간 다 되니까 라 여사가 ‘시마이’ 하면서 장사 끝내고. 하루 종일 즐길 거리가 전혀 없는 태주의 지루한 일상을 보여주는 건데, 상현(송강호)에게 ‘뱀파이어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하고 묻는 장면들은 그렇게 삶이 재미없고 지루해서 그런 거다. 그래도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지독한 사랑 이야기라는 점도 중요하다. <아델 H 이야기>도 감독님 추천으로 봤는데 너무 좋았다. 그런 사랑 이야기도 좋다.

-앞서 영화들이 큰 성공을 거뒀다고 보기 힘들고, 배우라면 누구나 꿈꾸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이기에 <박쥐>가 자신에게 좀 다른 의미로 새겨지기도 하나. =글쎄, 그건 내가 열심히 했을 때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못하면 더 욕먹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런 점을 특별히 의식했던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영화들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고, 무엇보다 나는 아직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태주가 상현에 대한 마음이 일편단심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슬프다는 생각도 들었다. 독특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다 보니 ‘오직 이 사람’ 그렇게만 생각할 줄 알았는데. =감독님이 말씀하신 포인트가 그 지점이었다. 태주가 단지 성욕을 채우기 위해 다른 남자를 통해서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관객이 ‘안돼!’ 하게 된다. 그래서 태주가 미워질지도 모를 거라고.

-그래도 기본적으로 태주는 참 귀여운 인물이다. 딱히 미워지지가 않더라. =다행이다.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다. 내가 시나리오를 읽고 난 다음 감독님께 했던 얘기가 “태주 너무 귀여운 거 같아요”였다. 영화 속에서 마치 정말 지옥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어진 환경에 너무 익숙해서 그런 일탈을 꿈꾼 철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일상에 익숙해지다 보니 행복을 찾을 수 없고 학습된 무기력함이 있었다고나 할까. 뭐든 좋으니까 제발 뭔가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상현을 만났을 수도 있다.

-다음에 또 박찬욱 감독과 함께한다면 어떤 역할을. =카메오. (웃음) 정말 뭐라도 불러주시면 흔쾌하게 행인 역이라도 하고 싶다. 그만큼 현장이 너무 즐거워서 촬영이 다 끝났을 때 ‘이제 더 안 찍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허무했을 정도다. 촬영 중에 부서마다 막내들만 모이게 된 모임도 있었는데, 난 배우 막내였고 어쩌다보니 다들 여자였다. 늘 쪼그리고 앉아 잡담하는 것도 행복했다. 아, 또 생각나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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