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연수 작가님. 저는 케이트 윈슬럿이라고 합니다. <씨네21>에 쓰신 글은 잘 읽었습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를 재미있게 보셨다니, 게다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제 얼굴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린다니, 저로서는 기쁘기 그지없습니다(이놈의 인기!). 그나저나 <센스, 센서빌리티>는 보셨나요? 그 작품도 괜찮지만 다른 작품을 하나 추천하고 싶네요. 영화는 아니고, 시트콤입니다. 영국 코미디언인 리키 저베이스가 주연을 맡은 <엑스트라즈>에 제가 카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2시즌, 에피소드3에 제가 나옵니다. 독일군에 쫓기는 수녀 역할이었는데 촬영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성질 많이 죽였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나서 제 입에선 이런 욕이 튀어나왔어요. “아, 씨팔, 무릎 아파 죽겠네.” 제가 입이 좀 거친 편이죠. 저의 진면목은 매기에게 ‘폰섹스’ 강좌를 할 때 제대로 드러나요. 저는 오른손으로 제 가슴을 움켜쥐고, 왼손으로 전화기를 든 채 이렇게 말했죠. “우훗, 나는 지금 침대에 누워서 베개를….” 그만할게요. 지면에 적긴 좀 거시기한 내용이니까 직접 찾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더 리더>의 연기만으로 저를 평가하는 우를 범하실까봐 걱정되어 편지 드렸습니다. <더 리더>에 출연하게 된 것은 <더 리더> 같은 홀로코스트 영화를 찍어야 오스카를 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하, 하, 하.
(P.S.) 김연수 작가님,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릴게요. <나의 친구 그의 영화>를 매회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저는 김중혁 작가의 글이 훨씬 좋더라고요.
라는 내용의 편지를 Y는 케이트 윈슬럿에게 받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나는 케이트 윈슬럿이 참 좋다. 나 역시 <더 리더>의 케이트 윈슬럿을 좋아한다. 마이클이 책을 읽어줄 때 그녀가 그 목소리에 반응하는 표정이나 아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대목에서의 표정은, 참 아름답다. 케이트 윈슬럿의 표정 못지않게 레이프 파인즈의 표정도 아름다웠다. 수십년 만에 고향집 자신의 방에 돌아온 그가 옛 책을 들추어보면서 짓던 희미한 미소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수십년의 시간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미소라니.
30, 27, 25… 저자의 나이 계산하기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고향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생각했다. 수십년 만에 돌아온 레이프 파인즈와 달리 1년에 서너번 고향집에 가지만 갈 때마다 책장에 꽂힌 책을 들추어본다. 어떤 곳에다 밑줄을 그었는지, 어떤 메모를 해두었는지, 그런 걸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뭐 이런 데다 밑줄을 그었어, 깜빡 졸다가 볼펜이 미끄러졌나?’ 싶은 곳이 많고, ‘이런 치기어린 감상은 또 뭐람’ 싶은 메모가 많다. 대문호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하루빨리 소각해야 할 자료들이다. 대문호가 되었을 때 꽤 값나가는 자료가 될지도 모르니 간수 잘하라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메모를 안 봐서 하는 소리다. 몇줄만 읽어도 온몸에 닭살이 돋을 것이다. 책들 사이에는 오래전에 쓴- 역시 하루빨리 소각해야 할- 소설이나 일기장 같은 것들도 쌓여 있는데 그곳에는 Y가 내게 준 (유치)찬란한 시 뭉텅이도 있다. 어찌나 찬란한지 눈뜨고 볼 수가 없다. 그 자료는 잘 보관 중이다. 소각하지 않을 것이다. Y가 조금 더 유명해지면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고향집 책들의 특징 중 하나는 저자 소개 페이지에 30, 27, 25와 같은 숫자가 적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변변찮은 소설을 쓰고 있었고, 몇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 편지를 받았고, 문학상 응모에는 매번 떨어졌다. 책을 사면 늘 저자의 나이를 계산해봤다. 몇년생인지, 첫 번째 책은 몇살에 펴냈는지 늘 확인하곤 했다. ‘이 사람은 서른두살에 첫 책을 냈군. 아직 내겐 7년이 남았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스물두살에 데뷔하다니, 천재네, 천재. 부럽군’이라며 나의 재능없음을 한탄했다.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했으며 천재가 아닌 채로 점점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에 또 한번 절망했다. 요즘에도 새 책을 사면 저자의 나이를 확인해보곤 하지만 이젠 천재들의 재능을 시샘하지 않는다. 천재라는 사실은, 살아가는 데 오히려 좀 불편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인생을 좀 깨닫고 있는 건가.
천재 물리학자와 천재 수학자의 뜨거운 대결이라는 카피로 선전되지만 실은 두 남자의 끈끈한 우정을 다룬 것이 아닌가 싶은 <용의자 X의 헌신>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천재 물리학자의 말이다.
“난 그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답에 이르는 과정은 완전 반대야. 물리학자는 관찰하고 가설을 세운 다음 실험으로 그걸 증명해나가지만 수학자는 머릿속에서 모든 걸 시뮬레이션하지. 수학자는 보는 각도를 달리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거야.”
확대해석하자면 세상에 라이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답에 이르는 과정이 전혀 다르듯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에 이르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방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1등과 2등을 가리는 스포츠는 그런 점에서 잔인하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가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전혀 다르다. 김연아는 아사다 마오보다 힘차고 정확하다. 아사다 마오는 김연아보다 우아하고 부드럽다. 김연아는 그렇게 자신을 완성해나갈 것이다. 아사다 마오는 그렇게 자신을 완성해나갈 것이다. 그 둘을 비교하는 잣대는 예술적 완성도가 아니라 회전의 정확성과 더 적은 실수다. 공평한 것 같지만 잔인하다.
작가 역시 일종의 기술자거든
내가 천재를 시샘하지 않게 된 것은 작가 역시 기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역시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해!). 작가 역시 일종의 기술자라서 평생 자신의 기술을 반복 연습해야 한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연습하여 스스로를 완성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일찍 인정받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끈질기게 자신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느냐다. 기술을 닦으면서 연습하는 동안 얼마나 행복한가이다.
작가든 스케이트 선수든 수학자든 물리학자든 모두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먼은 수많은 연습을 통해 바이올린을 잘 켜게 되면 리허설을 수십번 해도 매번 재미있다고 하는데, 나는 언제쯤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글을 쓰게 될까. 언제쯤이면 뚝딱뚝딱 글을 쏟아낼까. 언제쯤이면 ‘마감이 지났다고? <씨네21> 원고쯤이야 1시간이면 해결하지, 하하하’라며 실제로는 30분 만에 원고를 완성하게 될까. 30분 만에 쓴 원고가 아니냐는 의심을 요즘에도 자주 받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