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쥐>를 촬영할 때 세워놓았던 기본 컨셉은 무엇이었나. = 박찬욱 감독과 영화작업을 할 때는 최소한 각색 단계부터 참여한다. 각색 과정이 어떻게 변하느냐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게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본 컨셉도 시나리오가 각색돼가는 과정에서 정해지는 것 같다. 이번 컨셉은 알렉 소스(Alec Soth)라는 작가의 사진이 시작점이 됐다.
- 알렉 소스에게선 어떤 부분의 영향을 받았나. = 우리가 사진에서 영향을 받을 때는 구도나 정신세계가 아니라 색이나 채도 같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영화를 논할 때 콘트라스트나 색감이 중요하잖나. <박쥐>라는 영화가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지만, 알렉 소스의 사진에서 뭔가 명확하지 않고 짓누르는 듯하면서 답답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해맑은 신부 시절의 상현은 좀 밝고 어느 정도 콘트라스트가 있게 설정했지만, 뱀파이어가 된 뒤에는 콘트라스트가 약화된다. 일반 관객이 느끼기에는 약간 뿌옇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줄 정도로.
- 롱테이크가 꽤 많은데 카메라 움직임이 굉장히 많아서 그런지 숏 길이가 길게 느껴지진 않더라. = 몇개 손에 꼽을 장면을 빼고는 거의 모든 장면에 카메라 움직임이 있다. <올드보이> 때보다 현란하고 카메라 움직임의 폭도 크다. <올드보이>는 하나의 획이 큰 영화라 움직임을 과장되게 따라가 잘 어울리는 영화였다. 그런데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카메라가 배우들의 동선을 넘어가지 않는 범위에서만 움직였다. 이번에는 동선 이상으로 많이 움직였다. 그렇게 크게 움직이면서도 다른 영화보다 움직임이 적게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설계가 있었다. 콘티 작업이나 시나리오 작업에 초반부터 결합하는 일이 많은 도움이 되는 게 배우들의 감정을 많이 파악한 상태에서 가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카메라 움직임도 기계적인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 많이 나오게 된 것 같다.
- 움직임이 굉장히 다양하던데 어떤 장비를 썼나. = 스콜피오 헤드라고 무인 리모트컨트롤 장비를 썼다. 장비에 손 같은 게 나와 있어서 조종을 하면 카메라가 똑같이 움직인다. 그것을 쓴 이유는 배우와 근접해서 찍기 위해서다. 이동차를 깔고 찍을 때는 동선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배우가 아무리 자연스럽게 연기해도 ‘여기는 넘지 말라’고 주문을 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게 제한선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콜피오 헤드를 조그마한 크레인에 올려서 레일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어디로 움직여도 키그립과 눈 사인만으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 그렇게 배우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이유는 뭔가. = 내가 보기에 <박쥐>는 격정적인 감정이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배우들이 자기 감정에 충실했을 때 좋은 연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 것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테이크마다 아주 다르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미세한 차이가 좋고 나쁨을 결정하기도 한다.
- 세트장면이 굉장히 많은 것 같다. 나름대로 애로점도 있었을 것 같다. = 뱀파이어가 햇빛을 쐬면 죽는다는 설정이라 세트장에서 많이 찍었다. 이번에는 행복한복집이 2층이라는 설정이라서 각별히 세트를 튼튼하게 지어야만 했다. 튼튼하게 짓는다는 것은 세트장의 벽면을 떼는,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뎅강’이라 부르는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부엌도 어느쪽은 뎅강을 할 수 없어서 뎅강을 하지 않고 찍었다. 그리고 나 역시 뎅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좁은 방을 좁게 보이도록 찍는다면 실제로 좁은 공간에서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수도원 외경은 인상적이다. 계명대에서 찍었다던데. = 영화에 많이 나온 곳이다. <무림여대생>이나 <동감>도 거기서 촬영했다. 실제 수도원을 헌팅하기도 했는데, 허락을 받는 게 가장 큰 문제였고, 허락하는 곳은 우리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도 의외로 천주교에서 많이 도와주셨다. 신부님 한분이 붙으셔서 의식에 해당하는 부분도 도움을 주셨다.
- 시나리오를 솔직히 보여드린 게 맞나. = 어차피 나중에 가면 다 들통날 거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외형적인 것보다 이야기의 핵심을 제대로 간파한 것 같더라. 신부님 중 예술가 기질이 있는 분도 많더라. 창작은 창작이고 종교는 종교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고.
- 애초 소문만큼 엄청 야하진 않더라. = 그런 소문이 왜 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특정 장면은 야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 필요해서 들어가는 장면들은 야하지 않은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은 우스갯소리로 그런 거 찍으면 많이 좋지 않냐 하는데 좋은 건 하나도 없다. 베드신은 나나 박 감독님이 배우들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걸 편하게 만들어주고 거기서 원하는 바를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어떤 액션신이나 감정신보다 스트레스가 더하다.
-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송강호가 김옥빈을 끌어안고 옥상에서 뛰는 장면이다. = 스튜디오에 블루스크린을 칠하고 스콜피오 헤드를 와이어에 매달아서 찍었다. 굉장히 높은 스튜디오에서 위아래로 뛰었고 배경은 실제 배경에 가 찍어서 합성한 거다. 원래는 실제 공간에서 도기캠(인물 몸에 부착하는 카메라)으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빌딩 옥상은 와이어를 맬 곳도 없고 도기캠도 안전하지 않아서 아니다 싶었다. 고민도 많이 하고 속도 많이 상했던 장면인데 결과를 보니까 기분이 좋더라.
- 롱테이크가 많아서 한번 NG가 나면 정말 힘들어지겠다. = 아무래도 롱테이크에 움직임까지 많으니까 다시 찍는 게 어렵기는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들보다 내가 NG를 많이 냈다. 원치 않게 2년을 쉬어서 그런지 몰라도 감도 많이 떨어졌던 것 같다. 나는 내 촬영이 식상하거나 눈에 거슬리면 언제든지 제거될지 모른다고 불안감 속에 있는 사람이라서. 지금은 내가 어떻게 평가될까 하는 초조함이 있다.
-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촬영감독 중 하나인데 왜 그런 불안감을 갖나. = 박 감독님이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 같다. 이번 촬영 내내 감독님은 “다른 촬영감독의 일정은 어떠냐?”, 요구대로 잘 못하면 “다른 촬영감독은 하던데 자기는 못하는구나” 이러셨다. (웃음)
- 그래도 <복수는 나의 것> 이후에는 박 감독은 당신과 줄곧 작업해오지 않았나. = 내가 다른 촬영감독과 연락 못하게 막아서는 원천봉쇄를 한 덕분일 거다. (웃음) 어느 정도 작업에 개입되고 정이 들면 걷어내기 힘들어진다는 점을 이용한다. (웃음)
- 차기작이 이준익 감독님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인데 둘이 팀워크를 이룬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대조적인 결합이란 느낌이었다. = 실제로 충무로에서는 의외의 조합이라고 많이 얘기한다. 그런데 나는 이미 이준익 감독님에 맞춰서 변해가고 있다. 나는 매번 영화를 들어갈 때마다 시집 간다고 생각한다. 감독님을 잘 내조해야 하니까. 어떻게 보면 내 개인적 성향이 박 감독님과 꼭 맞는 건 아니다. 다만 ‘정정훈이라는 애가 나랑 너무 잘 맞아’라고 생각하게끔 내가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