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쥐>는 실내 분량이 많아서 프로덕션디자이너로서 일이 엄청났겠다. = 거의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아프리카 배경도 다 짓고 그랬다. 실제 촬영지인 호주에서 찍은 장면은 실험 자원자들이 배구하는 장면과 송강호가 찾아가는 병원뿐이다. 공간 수도 많았다. 그래도 다른 공간은 그냥 개념적으로 가면 되는데 ‘행복한복집’은 특히나 어려웠던 것 같다. 영감을 가장 많이 준 것은 시나리오에서 엿보이는 오페라틱한 느낌이었다. 계단을 통해서 오아시스 멤버가 한명씩 도착하고 카메라가 빠지면 복도가 보이고. 한 시퀀스 안에서도 굉장히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담은 콘티를 보면 오페라나 뮤지컬 찍는 것처럼 느껴졌다.
- <박쥐>의 전반적인 미술적인 컨셉은 무엇이었나. = 박 감독님은 ‘이건 이런 영화야’라고 얘기하는 분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많이 물어봤다. 외국 소설에서 뱀파이어는 이성중심주의에 반대해서 생긴 것인데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상현은 또 이런 요소에 반대인 존재더라. 피로 연명한다는 점에서 뱀파이어인데, 캐릭터에서 나타나는 상현의 태도는 굉장히 실용적이잖나. 그는 나름대로 논리를 막 세워서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사실 소재만 뱀파이어지 영화 전체를 읽었을 때의 느낌은 완전히 반대다. 그래서 감독님에게 많이 여쭤봤다. 흔히 뱀파이어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고딕적인 요소, 그러니까 로맨티시즘이나 그로테스크함이나 이런 것과는 반대로 가고 싶어 하시더라. 그것과 모든 것에서 반대되는 공간이 행복한복집이다. 감독님에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오순도순 셋이 잘 사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 너는 병균이야”라는 대사가 키워드라고 말했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것은 일본식 집에 한복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들은 보드카를 마시고 이난영과 남인수의 트로트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바흐의 음악으로 바뀌어 있으며 사람들은 마작을 하고 다양한 한약재들이 널려 있고. 무속적인 것도 있지만 한쪽에는 성모 마리아상도 있다. 결국 “이질적인 것들이 불균질하게 집합되어 있는 곳”이라고 얘기했다. 감독님 생각으로는 이 전체의 융합 전체가 모든 문화적인 것의 충돌이고 복잡하게 섞여 있는 느낌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병균이라는 뉘앙스처럼 살인이 도모되고 하니까 병균의 온상, 세균의 온상이라 벽지나 침대보에서 수초나 저수지처럼 살인과 관련된 이미지를 계속 상기할 수 있도록 하고. 라 여사의 방도 곰팡이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병균의 온상이고 이질적인 모든 것의 융합으로 보이게 했다.
- 말이 쉬워서 이질적인 것의 융합인데 막상 꾸민다고 생각하면 갑갑할 것도 같다. 그런 무질서 안에서도 나름 조화가 필요할 테니까. = 박 감독님의 시각적 미덕은 완전함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추구하는 점이다. 감독님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건 좀 다른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거다. (웃음) 취향 자체가 익숙하거나 전형적인 것을 싫어한다. 과시적이지 않으면서 뭔가 다른 것을 보여주려 한다. 이번에는 이질적인 것의 융합이라 할 때도 그 안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려 했던 것 같다.
- 한복집 세트에는 다채로운 색이 존재하는데, 그중에도 코발트나 푸른색 톤이 유달리 두드러지는 느낌이다. = 사실 소파만 코발트색이다. 나머지는 태주 옷에 그 색을 썼다. 나여사의 옷과 강우의 옷은 원래 브라운 톤이다. 그 집이 나여사에 의해서 꾸며지고 대물림되는 것이라 두 사람의 옷이나 라 여사의 방은 브라운, 레드톤이고 태주 의상은 가장 반대되는 색이니까 그게 많이 느껴진다. 침대보와 커튼은 그린 톤인데 앞서 말했듯 저수지의 수초를 연상케 하려 했다.
- 나중에 실내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다. = 그건 전적으로 감독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좀 초현실적인 느낌이 나면서 연극 무대 같기도 하고. 세균의 느낌을 지워버리려 하는 행동이다. 감독님은 작업을 하고 나서도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 그런 얘기를 잘 안 하는데, 그런 부분이 좋았다고 처음으로 칭찬받았다.
- 한복집 외경을 부산 전포동의 쌀집으로 설정한 이유는 뭔가. = 초이스가 많지 않았다. 적산가옥인데다 인근에 있는 이웃집과 어떤 느낌을 형성해야 하는데 그런 데가 생각보다 없더라. 적산가옥이 한 길가에 있다거나 양식이 너무 촌스럽거나. 여기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감독님의 취향을 가장 잘 느끼게 하는 로케이션은 추종자들이 텐트를 친 수도원 입구 긴 계단에 있다는 점이다. 감독님은 상승과 하강의 느낌을 원했는데, 우연히 그 계단을 보고 그 끝에 문을 닫아서 상승과 하강의 느낌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수도원과 일반 세계의 단절적인 느낌을 딱 드러냈다. 감독님은 이렇게 개념적으로 걸맞은 장소도 과감하게 선택하곤 한다.
- 한복집의 바닥재도 특이하더라. = 직접 디자인해서 종이에 일일이 다 출력했다. 워낙 부감숏도 많고 해서 바닥재가 중요할 것 같았다. 나무판에 장판재를 붙이고 다시 그 위에 종이를 붙인 뒤 코팅을 했다.
- 수포 디자인도 미술팀에서 했나. = 그렇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이고 무서운 요소는 수포 같다. 상현이 아프리카에서 돌아와 나타난 유일한 징후이고 죽음과 맞닿아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감독님에게 프레젠테이션할 때 수포 이미지를 진짜 많이 찾았다. 화농성 알갱이에서부터 아주 큰 수포도 있었다. 한복집의 병균처럼 수포는 단 한 알갱이도 보기 부담스러워야 했는데 감독님은 화농성 수포를 고르더라. 그런데 그게 매독 질환이었다. (웃음)
- 그 수포는 모두 CG였나. = 수포가 없어지고 나타나는 것은 CG로 작업했지만, 붙어 있는 상태는 다 일일이 붙인 거다. 매번 붙였다가 떼었다 했는데 송강호로서는 정말 고역이었을 거다.
- 박찬욱 감독과 함께 작업하면 좋은 점은 무엇인가. = 아까 말했듯이 일단 다른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강하다. 새로운 것을 작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그리고 지휘자라는 게 두가지가 있는데, 나 스스로는 팀원들과 작업할 때 깐깐한 타입이다. 감독님은 그 사람을 자극해서 막 끌고 오게 한 다음 놓아두는 편인 것 같다. 사실 그러기가 참 어려운데.
- 그런데 미술감독 입장에서는 뱀파이어를 다룬다면 고딕적인 양식으로 표현해보고 싶기도 했을텐데. = 정말이지 미술감독 입장에서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로망이 있다.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 한복집은 굉장히 어려운 공간이다. 침대보만 수백개를 검토했다. 게다가 돈을 막 쓸 수가 없으니까 별의별 짓을 다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새로운 것을 많이 시도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한국이 환경이 좋은 게 청계천 같은 데서 ‘로보트 태권브이’도 만든다잖나. (웃음) 미국에 잠시 있어봤지만 거기는 저작권 개념이 너무 강해서 손으로 그리지 않는 다음에야 뭔가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은 그런 게 좋다. 며칠 전 동대문 시장 패션쇼에 선보인 옷이 조악하지만 덜컥 나와 있고 하니까.
- 박찬욱 감독의 영화 여러 편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 이제 팀워크도 대단할 것 같다. = 이번 영화에서 그게 결실을 맺은 것 같다. 기술시사에서 보니까 클라이맥스 장면과 대학살 시퀀스는 음악이나 카메라워크나 조명이나 미술 같은 요소, 거기에 연기까지 더하니 처음 하는 스탭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전율을 느끼겠더라. 이번 영화에서는 정말 팀워크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