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패기 넘치는 영화를 만나고 싶다면 이 영화들을 먼저 주목하시기를. 신인들의 국제경쟁부문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들.
<도쿄 랑데부> Tokyo Rendezvous
감독 이케다 치히로 | 일본 | 2008년 | 104분 | 35mm | 컬러
최근 일본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아버지의 부재’다. 가정의 부재로 아이들이 혼자 자란다거나(<새드 배케이션>), 작은 균열이 어떻게 가족을 한순간에 붕괴시킬 수 있는지(<도쿄 소나타>)와 같은 소재를 다루어왔다. 여성감독 이케다 치히로의 데뷔작 <도쿄 랑데부> 역시 그런 경향들에 편승하는 듯하면서도 현실을 그려내는 시선은 긍정적이다.
노가미(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은행 빚 때문에 할아버지에게 그들이 사는 오래된 아파트를 팔자고 설득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요지부동. 둘의 갈등이 깊어갈 쯤 직장을 그만두고 갈 곳 없는 미사키(가세 료)와 역시 마땅히 하는 일없이 선을 보러 다니는 료코(가가와 교코)가 이 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된다. 그리고 세명의 젊은이들은 우연히 어느 방에서 할아버지와 그를 보살피는 후지코간의 사연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두 세대는 서로를 이해하고 교감하기 시작한다. 배우들의 연기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인물의 행동보다 한 템포 느린 촬영인데, 이것은 사라질 위험에 있는 옛 공간을 강조하면서 서사를 풍부하게 한다.
<익스플로딩 걸> The Exploding Girl
감독 브래들리 러스트 그레이 | 미국 | 2008년 | 79분 | HD | 컬러
오래 친구로 지낸 남녀가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 드라마. 여름방학을 맞은 대학생 아이비는 캠퍼스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간질을 앓기에 늘 조심해야 하는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삼키고 참는 편. 남자친구 그렉과 어렵게 통화가 될 때마다 어색한 침묵이 흘러도 마음속 불편함은 쉽게 꺼내지 못한다. 한편, 아이비와 어린 시절부터 플라토닉한 우정을 이어온 알은 비밀스럽게 감춰온 짝사랑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브루클린의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익스플로딩 걸>은 맑은 날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같은 영상의 영화다. 흩날리는 귀밑머리를 넘겨주고, 빨대 하나로 음료를 나눠 마시는 등 서로의 감정을 발견하는 순간 역시 자연스럽게 아름답다. 그러나 서사를 보여주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뉘앙스로만 이야기를 끌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발작하는 아이비의 몸을 알의 뒷모습에 가려둔 채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팔만 거리를 두고 응시한 카메라의 시선도, 조용하지만 힘있는 이 영화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데 일조했다.
<비> Rain
감독 파울라 헤르난데스 | 아르헨티나 | 2007년 | 110분 | 35mm | 컬러
유리창 위로 비가 떨어진다. 사위는 슬픔에라도 잠긴 듯 온통 눅눅하다. 극도로 정체된 도로. 여인이 홀로 타고 있던 차 안에 불쑥 침입자가 끼어든다. 손에 상처를 입은 채 쫓기던 남자를, 그녀는 받아들인다. 의외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순순히. 남자의 이름은 로베르토. 그는 며칠 전 30여년 만에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왔다. 알바라는 여인은 별 이유없이 그를 호텔까지 데려다주는 호의를 베푼다. 비밀을 감춘 그들은 그렇게 헤어지지만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는 상처 입은 두 사람이 그 치유법을 찾아내는 과정을 좇는 멜로드라마다. 어린 시절 갑작스레 사라진 아버지를 여전히 원망하는 남자와 9년간 함께한 애인과 헤어진 뒤 모든 걸 버려두고 도망쳐나온 여자. 서로에게서 자신의 과오와 갈망을 거울처럼 들여다본 그들은 남은 삶을 이어갈 용기를 얻은 채 조용히 이별한다. 두 주인공 대신 끊임없이 눈물 흘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는 때론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 속 그것처럼 고즈넉하지만 환상적이다.
<동베이, 동베이> A North Chinese Girl
감독 저우펑 | 중국 | 2008년 | 81분 | 35mm | 컬러
<동베이, 동베이>는 하얼빈에 사는 샤오쉬에의 고단한 삶을 그린 영화다. 낮에는 백화점 의류매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가라오케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는 그녀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를 임신시킨 남자 웨이는 그녀를 책임지지 않고, 샤오쉬에는 홀로 남는다. 함께 술을 마시며 걱정해주는 친구(들)는 있지만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있어주지는 못한다.
시종일관 멀리서 바라보는 카메라는 인물에 감상적인 접근을 경계한다. 그리고 극 중간마다 인서트로 등장하는 공연장면은 소격효과를 거두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이것은 갈수록 흥겨워지는 공연과 점점 더 힘겨워지는 샤오쉬에의 삶을 대비시키면서 삶의 아이러니함을 극대화한다. 이처럼 화려한 대도시의 이면을 냉철하게 바라보려는 감독의 시선은 그녀의 마지막 행동과 시내에서 출발해 교외로 빠져나가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개발 중인 하얼빈의 풍경이 결합되면서 정서적으로 큰 울림을 준다. “난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해”라는 샤오쉬에의 극중 한마디는 현재 하얼빈, 나아가 중국 현대인들의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