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안면이 있는 경남 진주시의 한 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진주의 지역신문 편집국장 자리가 공석인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했다.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잊고 지내다가, 일주일 뒤 어느 결혼식장에서 잘 아는 선배였던 그녀와 마주쳤다. 얼굴을 보자마자 진주에서 걸려온 그 전화가 퍼뜩 떠올랐다. 그녀의 고향이 진주였기 때문이다. 슬쩍 운을 띄웠다. 그녀는 마침 영화지 <프리미어>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한 직후였다. 그녀는 10초도 안돼 관심을 보였다. 한달 뒤, 거짓말처럼 그녀는 서울을 떠나 진주로 갔다.
하지만 두달이나 됐을까? 진주의 지역신문에 입성해 “조심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멋진 편집국장 인사말을 쓰고, 그걸 본 대선배가 어느 시사주간지에 “그래 조심하지 마라”는 칼럼으로 화답을 할 때쯤 그녀는 진주를 떠버렸다. 경남 하동의 청학동 골짜기 산중에 들어가 산다는 소문이 들렸고, 가끔 홀연히 거처를 옮긴다는 말도 전해져왔다. 지리산을 떠돌던 그녀는, 2007년 봄부터는 충북 괴산의 월악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누군가와 함께 감잎도 따고 농사도 짓고 게임도 하면서 도인처럼 산다고 했다.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하며 살던 그녀는, 2009년부터 조금씩 세상에 말을 건넸다. <씨네21>에 실린 ‘최보은의 돈워리 비해피’가 그중 하나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돌풍 같은 삶을 살았다. 가끔 깜짝 놀랄 만한 사고를 쳤는데, 칠 때마다 대형사고였다. 어쩌면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인생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마감날 아침 전화가 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돈워리 비해피’는 이번호가 끝이다. 월악산 자락을 뜬다고 했다. 당분간 멀리 떠난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사고란 말인가. 그녀는 “자신에겐 원고를 느닷없이 중단하는 게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녀는 마지막 인사 대신 편집장 칼럼으로 쓰라며 문장을 불러주기도 했다.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아귀가 어느 시골의 PC방에 짱박힐는지, 아니면 아프리카의 공사판에서 식모로 일할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동안 원고 받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보은, 그 이름만 들어도 학을 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안티팬에도 시달렸는데 이젠 안도감이 든다. 다른 고급필자를 빨리 찾아야겠다.” 지독하게 그녀다운 피날레다. 진짜 마지막 멘트를 부탁했다. 역시 칼럼을 쓰는 동안 붙여진 별명 ‘최보살’답게 쳇바퀴 인생을 조롱한다. “시키는 대로 살려니까 심심해 죽겠지? 메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