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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욕의 이해
고경태 2009-04-17

<똥파리>

‘똥파리 좆나 솔직하게 날다.’ 이번호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처음엔 이런 제목이 달렸다. 양익준 감독의 새 영화 <똥파리>를 소개하는 기사(92~95쪽)에서였다. 글을 쓴 기자가 마지막 문장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욕으로 버무렸고, 편집기자가 이를 과감하게 제목 문장으로 올려서였다. ‘졸라’도 아니고 ‘좆나’라…. 영화의 대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원색적인 욕 천지인지라 기사 제목에 상징적인 욕 하나 넣는 게 어떠랴 싶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다른 제목 문장으로 바꿨다. 잡지에 큰 활자로 욕을 붙이는 건 부담스러웠다. 욕 먹기 십상이었다.

사실 그런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은 많다. 두세달여 전의 에피소드다. 주말 대낮의 한산한 전철 안에서였다.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두명이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엄마는 40대 중반으로 보였고, 딸아이는 중학생 교복을 입었다. 앳되고 예쁘게 생긴 딸의 입에선 이런 말이 나왔다. “엄마, 이 볼펜 좆나 예쁘지?” 뜻밖에도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래? 이리 줘봐. 뭐 별로네.” 딸아이와 친구 먹기로 한, 뭔가 색다른 철학을 지닌 엄마였을까? 엄마의 반응이 특별했을 뿐, 이 정도 욕은 약과다. 청소년들이 자기네끼리 몰려다니며 쏟아내는 언어들을 들을라치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X발, X새끼 등은 아주 기본이다. 욕쟁이 소년소녀 꿈나무들 참 많다.

욕이 친분의 징표인 건 사실이다. <그랜 토리노>에서 월트 코왈스키는 이탈리아계 이발사와 능청스럽게 비속어를 주고받는다. 오히려 정겹고 따뜻한 풍경이다. 욕은 그만큼 허물없는 관계에서 나온다. 나이 들어서도 마음껏 욕을 배설할 만한 친구가 있다면 행복하다. 그 때문인지 영화에서 살벌한 욕이 쏟아지면 께름칙하다가도 웃음이 터진다. ‘씨발놈아’가 100번도 넘게 나오는 <똥파리>, ‘fuck you’가 역시 100번도 더 나오는 <킬러들의 도시>를 볼 때도 그랬다.

욕이 살짝 불편했을 때는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을 볼 때였다. 2006년 여름, 미군기지 확장으로 인해 경찰과 용역들이 평택 대추리·도두리를 에워싸고 가옥들을 철거하기 직전이었다. 한 인터넷 뉴스사이트에서 이를 동영상으로 생중계했다. 중년의 부인들과 할머니들은, 몸싸움이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거칠고 쉼없는 욕으로 어린 전경들을 자극했다. 그녀들의 편이었지만 난 속이 탔다. “저 욕 안 하면 안되나? 좀 점잖게 대응할 수 없나?” 되돌아보면 책상물림의 싸구려 감상이었다. 욕이 천박한 게 아니라, 현실이 천박했다. 욕에 집착하는 내가 더 저질이었다. 이번호 씨네인터뷰에 등장한 이강길 감독(70~72쪽)의 작품 제목처럼 그녀들은 ‘살기 위해서’ 절박했을 뿐이다. 새만금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살기 위해서>를 아직 보지는 않았으나, 그곳에 등장하는 문정현 신부도 욕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