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입으로 말하긴 힘들다면서 잘생긴 외모가 문학에 방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Y의 뻔뻔하기 그지없는 글을 보고서, 과연 Y는 잘생긴 것인가, 문득, 생각해보았다. 오래전 일이지만 한때 ‘문단의 3대 미남이 존재한다’는- 행여 누군가 들을까봐, 결국 문단에서는 이 정도를 미남이라고 부르는 것이냐? 사람들이 실망할까봐, 겁났던- ‘루머’가 작가들 사이에 떠돈 적이 있었는데, 그 문단의 3대 미남 중 한 사람이 바로 Y였으니 (다른 두 사람의 실명은 신변보호를 위해 생략) 잘생긴 것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잘생긴 외모가 문학에 방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마흔(본인의 말로는 여전히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상당한 문학적 성과를 이뤄낸, Y의 진정성을 향한 의지는 가히 인간문화재급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진정성에 목을 매던 그때 그 시절
진정성, 이라고 하니 나도 문득 떠오르는 얘기가 있다. 지난해 여름 Y와 나는 등단한 이래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이 아닐까 싶은데) 독자와의 만남을 함께한 적이 있었다. 독자들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와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하던 중 Y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스무살 무렵이었습니다. 둘이서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강원도 어느 곳을 지날 때였어요. 그땐 시가 넘쳐날 때였습니다. 모든 걸 시로 썼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걸 시로 쓰고, 아무거나 시로 썼죠. 그런데 기차 안에서 김중혁이 저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이건 시가 아니다. 이건 시가 아니니까 태워버리자.’ 저를 선동한 겁니다. 저도 생각해보니까 시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차 안에 사람도 없기에 거기서 시를 태웠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일을 내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내가 과연 그랬던가. Y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문학의 진정성에 목을 매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와 시 아닌 것을 가르고, 그걸 태워버리자고 했으니, 그것 참, 낯 뜨겁고 끔찍한 대사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런 우를 범하곤 한다. 문학이 없으면 곧 죽을 것 같았고 (이젠 알지? 절대 안 죽는다!), 문학의 진정성에 토를 다는 자는 배신형, 배반형으로 낙인 찍어버렸다. (겨우 나보다 한두살 나이 많은) 선배들을 붙들고 별 쓸데없는 질문을 다 던지거나 나 혼자 외롭게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짊어지고 있었으니,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고뇌하고 있는 내 자신의 뒤통수를 겁나 세게 후려치면서 이런 노래를 불러줄 텐데. “사는 게 힘들어도 얼굴 찌푸리지 말자. 정신 차리고 고쳐보자, 팔자. 고민하지 마 머리 빠진다. 우리는 내일을 향해 달린다.”(에브리바디 <링 마이 벨>!)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안다. 그런 시간이 있었으니 이렇게 가벼워질 수 있었다. 선배들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혼나고), 후배들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받고 (혼내고), 온갖 고민을 혼자 짊어져본 뒤에야 가벼워질 수 있었다. 가볍다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이젠 적어도 목을 매지는 않는다. 사람에 대한 생각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가벼운 척하면서 무거운 사람을 좋아할 수는 있어도 무거운 척하면서 가벼운 사람은 곁에 두고 싶지 않다.
시 한편도 5메가바이트를 넘게 해주시오
코언 형제의 (다들 아시죠? 코언의 스펠링은, 시, 오, 이, 엔!) 영화는 그래서,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최대한 영화를 가볍게 뽑아낸다(뭐, 최근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예외로 할까요). 한마디로 시시껄렁하다. 뭐, 이런 걸, 거 참, 영화로까지 만드셨어요, 싶은 이야기인데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와도 딱히 뭐라 감상을 이야기하긴 참 거시기하고, 주제의식은 엿 바꿔먹고 관객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는 개나 물어가라, 싶은 의도를 보이고 있으니 그야말로 시시껄렁하다. 나는 코언 형제의 그 시시껄렁함이 참 좋다.
이번 영화는 좀 다를 줄 알았다. 제목이 무섭다. <번 애프터 리딩>이라, 읽고 나서 태워버리라니, 예전에 코언 형제도 시를 좀 쓰셨던가, 시를 좀 쓰시고 비둘기호 기차에서 시를 활활 태워보셨던가, 그런 분들이었다면, 역시, 경계를 늦추어선 안될, 무서운 분들이다. 나는 <번 애프터 리딩>이라는 제목을 들으면서 다른 이야기를 상상했다. 첩보원들의 세계, 읽고 파기해야 하는 비밀문서의 세계, 이 문서는 읽고 나서 5초 뒤 자동으로 폭파합니다, 리딩 임파서블, 과 같은 세계, 배신과 음모와 살인과 협잡의 세계를 상상했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코언 형제의 영화다. 그래서 다행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도, 허허 거 참, 브래드 피트는 뭐랄까, 하하하, 좀 그렇죠? 와 같은 말밖에 할 수 없지만 가벼운 척하면서 그 뒤에다 뭔가 묵직한 걸 숨겨두는 코언 형제의 영화가 좋다.
읽고 나서 태워버리라는 말은 멋지게 들리기도 한다. 요즘처럼 모든 게 파일로 이뤄지는 세상에선 태워버린다는 행위가 참신하게 느껴진다. 원고지에 깨알같이 써놓은 글을 태울 때, 글자와 글자가 까맣게 타들어갈 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쉽게 바스라지는 재로 변했을 때의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경건하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모든 것이 파일로 오가는 요즘의 문화가 불만스러울 때가 있다. 원고지에다 글을 쓸 때는 실물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쓰는 글의 부피와 노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로 글을 쓴 다음 그걸 파일로 보내고 나면 뭔가 허망하다. 허공에다 글을 쓰고 바람이 그걸 지워버렸을 때처럼 허망하다. 또 하나 불만스러운 것은 문서의 파일 크기다. 볼만한 사진 한장은 5메가바이트다. 들을 만한 음악 한곡을 파일로 만들면 8메가바이트 정도다. 재미있는 영화 한편을 파일로 만들면 1기가바이트가 넘는다. 그러나 장편소설 한권을 파일로 만들어도 1메가바이트를 넘지 않는다. 아무리 길게 써도 도저히 넘길 수 없다. 불공평하다. 어떻게 쓴 글인데, 억울하다.
오피스 프로그램을 만드는 모든 회사에 제안한다. 문서파일의 크기를 적어도 5메가바이트보다 크게 만들어주세요. 시 한편만 써서 파일로 만들어도 5메가바이트를 넘게 해주세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 쓴 장편소설 넘기려고 하는데요, 파일이 너무 커서 첨부파일로는 보낼 수 없겠네요. 무려 10기가바이트도 넘어요. 대용량 파일로 보내거나 외장하드를 퀵서비스로 보내거나 해야 할 것 같아요. 파일이 이렇게 큰 걸 보면 얼마나 거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알 만하지요? 하하하”라는 실없는 농담을 출판사에다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실제로는 장편소설 한권 분량을 전자우편에 첨부해서 보내는 시간이 0.5초쯤이나 될까? 보내기 단추를 누르면 눈 깜빡할 사이에 ‘전송 완료’라는 창이 뜨니 이래서야 어디 글 쓰고 싶은 의지가 생기겠는가 말이다. 아, 출판사 직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 소리 마시고 지난해 여름에 출간하기로 했던 장편소설 원고나 빨리 좀 넘겨주세요.”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