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10월27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열린 영화진흥위원회의 ‘한국영화산업 활성화 단기대책’ 기자회견 현장.
문화의 다양성을 살리기 위해 영진위가 당연히 해야 할 ‘다양성영화 마케팅 지원’을 폐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김봉석의 의견에 필자 또한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상업적이든 예술적이든 각자의 목적을 가진 개인이나 사기업이 기본적으로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보는 그의 의견에도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상품으로서의 영화를 만드는 데 굳이 제작지원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는 그의 의견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상품으로서의 영화, 요컨대 상업영화에 대한 제작지원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10여년간의 영화진흥정책을 되돌아보건대 영진위를 중심으로 한 한국영화에 대한 지원책은 문화적 다양성 확보의 층위에선 직접적인 지원책을, 산업 활성화의 층위에선 간접적인 지원책을 동시에 펼쳐왔던 역사를 갖고 있다. 그가 역설한 바처럼 영진위는 “영화산업과 문화의 기반 시설을 확충하고, 영화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기에, “기업이 해야 하는 일은 빼고”가 아니라 ‘기업이 해야 하는 일조차 빼지 않고’ 한국영화산업과 한국의 영화문화가 양질의 전화를 기할 수 있는 정책이라면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친 백화점식 지원정책을 펼쳐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메이저를 위한 직접적인 지원책은 없었다
그런데, 김봉석의 ‘기업이 해야 하는 일은 빼고’라는 의식의 근저에 과연 어떤 대상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국내 메이저 투자·배급사 등을 고려한 판단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 메이저 투자·배급사를 위한 직접적인 지원책은 단 한 차례도 존재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가내수공업 규모 정도에 해당하는 중소 제작사들이 단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 장사치들이기 때문에 지원 대상으로부터 배제당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인가.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1990년대 이래로 IT산업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나 아니면 중소기업청이나 중소기업진흥공단까지 두며 정부차원에서 중소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막대한 규모의 예산을 수반한 정책을 시행해왔는데 이 또한 정책의 영역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그의 주장은, 그가 표현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는 절실함”과 절박함이 필요한데, “눈먼” 지원금이 투입되면, 영화와 같은 크리에이티브 산업에는 그야말로 독약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더욱이 김봉석은 문화의 다양성에 천착하면서도 ‘개봉지원’은 동의하나 ‘제작지원’은 동의할 수 없다는 자신이 전개한 논리와 배척되는 의견을 자신의 글에서도 피력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 영진위가 시행한 “상업영화 제작지원’이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결과론적 양태에만 집착한 나머지, ‘제작지원’ 그 자체가 정책의 프레임에 설계되어온 과정과 역사는 잊은 채 자신의 ‘독설’ 프레임에 국가의 문화정책, 특히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적 가치와 필요성을 함몰시킨다.
김봉석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기본적으로 창작자의 사적인 욕망이 우선하지만 배급과 흥행에는 산업적인 시스템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에 개봉지원이 제작지원보다 더 중요하다는 논리를 설파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상업적 속성과 거리가 먼 ‘독립영화’를 제외한 저예산 상업영화나 예술영화 등 상업영화와 경계 구분이 모호한 종류가 다른 상업영화의 영역 또한 어차피 상업영화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작지원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느낀다.
이 대목에서 그는 지난 10여년 동안 상업영화의 영역에서 이른바 예술영화와 저예산 상업영화의 외피를 두른 비주류 상업영화의 투자·제작 시스템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상업영화는 그것이 예술영화든 저예산영화든, 대중 상업영화든 메이저 투자·배급사 또는 창투사의 메인투자와 부분투자와 연동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제작되기 힘든 구조를 갖고 있다. 아무리 영진위가 지난 10여년 동안 ‘저예산영화 제작지원’, ‘예술영화 제작지원’, ‘한국영화 제작지원’ 등 명칭을 바꾸어가며 제작지원 사업을 시행해왔어도, 단 한편의 100% 공적자금 펀딩으로 완성된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진위가 2000년 이후 결성한 투자조합들을 통해 투자된 주류 상업영화의 경우도 결국엔 간접지원 방식의 투자정책을 통한 결과물들이다.
누가 구 영진위를 절대적인 선이라 했는가
그렇다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제작지원을 정책의 영역에서 탈구시킨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아마도 한국의 메이저 투자·배급사와 부분투자를 담당하는 창투사에 우리가 알 만한 예술영화 감독들이 신작 프로젝트 기획안과 시나리오를 들고 다가서는 즉시 “참 좋은 기획인데 저희와는 맞지 않는 것 같네요”란 얘기를 들을 가능성이 90% 이상일 것이다. 영진위가 다양성영화 투자 활성화를 위해 출자한 2개의 ‘다양성영화투자조합’ 또한 사정은 다르지 않다. 펀드 수익률 자체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운영 원리인 투자조합에 있어 다양성영화의 투자 기준 또한 상업적 성공 확률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봉석의 주장대로 “상업적이든 예술적이든 각자의 목적을 가진 개인이나 사기업이 기본적으로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판단하면서 투자할 수 있는 개인이나 사기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문화 다양성 차원을 좀더 높이고 공고히 하기 위해 영진위가 ‘개봉지원’ 정책을 유지해야 할 이유 못지않게 여전히 ‘제작지원’ 정책을 끊임없이 혁신적으로 운용해야 할 이유는 단순하게도 한국영화산업의 현실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영진위가 새로운 지원정책을 입안하는 데서 부디 정책이 실행되어온 역사적 과정과 맥락을 왜곡하면서 ‘독불장군’식으로 탈맥락화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끝으로, 김봉석이 글의 말미에 “지금까지의 영진위를 절대적인 선(善)으로 놓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비난하는 것은 독선적인 태도”라는 정말 엽기적이기까지 한 견해에 몇 마디 덧붙인다. 누가 지금까지의 영진위를 절대적인 선이라고 주장했는가? 그런 적이 과연 영진위 출범 뒤 단 한 차례라도 있었는가? 그러한 독설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당시나 여러 공개된 행사에서 강한섭 위원장이 이전 영진위를 구성했던 인사들에 대해 ‘얼치기 진보주의자’라며 힐난하던 모습과 묘하게 중첩된다. 과연 영화계 내의 어느 누가 영진위를 절대적인 선으로 놓고, 영진위가 그동안 설계해온 정책 프레임에 벗어나는 비판을 하면 무조건 비난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인가?
“국가의 개입, 바꿔야 할 건 스타일”
그동안 영진위의 진흥정책이 비교적 ‘공공선’을 지키려고 노력해왔다는 점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이따금 잡음이 생길 때마다 영화계 종사자들이 영진위 안에서 발생한 논란들에 대해 수수방관해왔던 적이 있는지 한번 따져볼 문제다. 오히려 문제는 지난 시기까지의 영진위는 얼치기 진보주의자들이 이너서클을 형성해서 자기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해왔다는 좌우 프레임 논쟁을 전면에 부각시키며, 현재의 4기 강한섭 위원장 체제에 반하는 의견을 보이는 이들을 모두 좌빨이라고, 과거 영진위 일부세력들의 동조자라고 폄훼하는 야만스런 태도에 있다.
혹시라도 잊었다면 당시 발간된 <씨네21>이나 영진위 자료를 통해 다시 한번 살펴보기를 당부한다. 영진위가 1999년 5월 출범 이후 영화진흥정책 설계 당시 영화계 제 주체들과 함께 ‘소통과 타협’을 통해 고민했던 기억들 말이다. 알다시피, 영진위 출범 후 최초의 한국영화진흥 종합계획은 이듬해인 2000년 초에 발표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영진위는 분야별 진흥업무 설계를 위해 산업계, 학계 등을 아우른 전문가 풀을 확보하여 9개월여 동안 지속적으로 포럼, 간담회, 공청회를 개최하고, 최종 의사결정기구인 영화진흥위원회를 통해 이를 수렴·조정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과정에서 특히 통상적인 상업영화가 아닌 저예산영화, 예술영화에 대한 진흥정책은 당시 프랑스의 60%법(프랑스 국적 영상물 편성 의무제)이나 프로덕션 쿼터제 등의 사례를 참고하자는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여, 저예산영화 공동제작 방안을 설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설계는 당시 영국의 초저예산영화(micro-budget film)나 보육영화(nursery pictures)가 보여준 사례처럼, 주류영화인 상업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테마나 스타일에서 주류 상업영화와는 다른 가치를 지닌, 오히려 가치 전복적일 수 있는 비주류 상업영화의 힘을 주목한 데서 출발한다. 그런 가운데 정책 영역에서 독립영화라는 개념을 최초로 수용하고, 이후 예술영화, 저예산영화 등을 아우른 당대 영진위가 명명한 다양성영화 지원정책의 틀을 만드는 것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뒤 아직 발표조차 하지 못하는 새 정부의 한국영화진흥 종합계획이 영진위 출범 이후 급변해온 영화산업과 문화적 지형의 현재적 변화를 충분히 수렴한 계획이 되려면, 그래서 뭔가 유용한 정책적 전망이 되기 위해선 적어도 지난 시기 영진위가 시도하고자 했던 ‘소통과 타협’의 절차적 합리성이란 과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현재의 영진위가 그러한 절차적 합리성을 견지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현재의 영진위를 둘러싼 그 많은 갈등들에 대한 의문과 문제제기가, 이미 과거가 돼버린 전임 기수 위원회들에 대한 정리 작업보다 후순위여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지난 영진위 3기를 정리하면서 영진위가 발간한 어느 보고서에 적힌 구절을 평론가 김봉석 또한 한번 되새겨볼 일일 것 같아 끝으로 인용한다.
“국가의 개입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국가의 문화참여라는 원칙이 아니라 그 방향과 방법에 대한 것이다.… 바꿔야 할 것은 스타일과 행정의 개념이지, 선의를 가진 합리적인 개입이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