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식품회사 간부 루시 힐(르네 젤위거)은 한 공장의 자동화와 구조조정이라는 업무를 떠맡는다. 불행한 일은 그 공장이 춥기로 유명한 미네소타주의 뉴 얼름이라는 마을에 있다는 점. 따뜻한 마이애미를 떠나 눈밭으로 둘러싸인 뉴 얼름에 도착한 루시는 텃세 심한 공장 노동자들과 마찰을 겪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를 대하는 마을 주민들에게 서서히 끌리기 시작한다. 특히 지역노조 대표 테드(해리 코닉 주니어)와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정분을 쌓으면서 루시는 이 마을에 동화된다. 하지만 본사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루시는 갈등을 겪는다.
<미쓰 루시힐>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다. 짐작할 수 있듯 대도시 생활에 젖어 있고 출세욕에 불타던 루시는 상종하기 싫은 시골 사람들과 벽을 쌓고 살지만 결국 그들의 투박하지만 진심어린 애정을 깨닫게 되고 그 안에서 사랑도 찾는다. 아울러 그녀는 불편한 시골 생활에 적응하면서 온갖 해프닝을 빚지만 마침내 따뜻한 공동체적 가치의 소중함 또한 체득한다. 닳고닳은 장르의 공식을 크게 비껴가지 않는 이 영화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건 갈등의 축일 것이다. 루시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구조조정과 감원을 시행하려는 회사의 대행인이고 완고한 성격의 테드는 소중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의 대변인이다. 그러니까 <미쓰 루시힐>의 두 남녀가 알콩달콩 미운 정을 쌓는 배경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심각하고 첨예한 사안인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양대 계급을 상징한다고 할 법한 두 사람의 대립은 다소 싱겁게 해소된다. 루시는 자동차 사고를 겪은 뒤 마을 사람들, 특히 자신을 구출해준 테드의 살가운 정을 느끼면서 서서히 마음을 연다. 이에 따라 루시의 내면을 지배하던 이윤 극대화나 효율 증대 같은 냉정한 자본주의적 가치 또한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고 도와주는 공동체성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다. 이제 이 자본가(의 대행자)는 공장 노동자들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 편에서 문제해결을 꾀한다. 때문에 <미쓰 루시힐>은 오바마 시대에 대한 낙관적 기대감을 담은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이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자본주의에 ‘인간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미쓰 루시힐>의 핵심은 ‘21세기 자본주의론’이 아니라 르네 젤위거다. 젤위거가 연기하는 루시는 고주망태가 돼 술주정을 하고 엉덩이에 달린 지퍼를 열기 위해 굴욕스러운 자세를 취하며 난간에서 벌러덩 넘어지는 몸개그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러니 루시가 ‘성공한 브리짓 존스’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불행한 사실은 젤위거의 망가지는 연기가 마냥 귀엽고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 그게 세월 탓이라 한들 반복의 피로감 때문이라 한들 어찌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