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난 스타 또는 만화가의 팬클럽 회원이다. 심지어 팬클럽 부회장 선거에 떨어진 게 억울해서 분루를 삼킨 적도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 일 때문에 그 당사자를 만나야 하는 자리가 생기면 오히려 절대로 가지 않는다. 밥 먹다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의 방송이 나오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든지 그 세계에 상당히 어두운 척하는 어색한 발연기가 작렬한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직접 만나게 되면 심지어 대놓고 무시하거나 “그 작품은 왜 그래요?”라는 말까지 내뱉는다. 아… 이놈의 츤데레 근성!! 이 무쓸모한 이중생활이라니. 밤엔 팬클럽 게시판에 미친 듯이 흑하면서 스타에 대한 악플에 악플로 맞서는 3차대전의 포격수였다가 낮엔 ‘우아한’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라니…. 하지만 문제는 낮에도 우아하지 않다는 데 있다. 난 준비하던 영화 한편이 엎어지고 다시금 새 준비를 시작한 저렴한 PD에 불과하니까.
우아함은커녕 약간 아니 꽤 웃기는 상황이다. 이젠 낮과 밤이 혼연일체다. 게시판의 내 인격이 현실에도 나타난다. 문제는 나 같은 팬덤 괴인이 여주인공인 작품을 준비하면서 작가와 1년 동안 취재 다니며 알아본 결과, 이런 타입들이 꽤 많다는 거…. 젝스키스와 HOT 팬력을 드러내면서 웃는 그녀들이라니,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팬덤에 울고 팬덤에 웃는 우리란. 다들 약간씩 숨기고 말을 하지 않지만, 알아볼 땐 알아볼 수 있다. 그건 마치 시네마테크에 가서 영화를 볼 때 서로 모르는 사람이지만 공기만으로도 뭔가를 공유하는 의식 같은, 또는 주성치 팬들이 <희극지왕> 개봉 당시 혼자 보러 와 다같이 친구 같은 느낌으로 엉엉 울던 느낌이랑 비슷하다. 그건 장국영이 죽었을 때 극장 앞에서 <아비정전>의 맘보춤 플래시몹을 한 것과 같다. 그건 축구 때문에 미쳐서 여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피버 피치>의 남자주인공과 같다. 그건 <꽃보다 남자>에서 F4가 나오는 장면을 보다가 주성치의 <당백호점추향>을 떠올리는 괴이한 연상법과도 같다.
이 빠순이 기질은 장르를 총망라한다. 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 작가의 작품이 출간되면 교보문고로 뛰어가 가장 먼저 나온 책을 사온다. 좋아하는 가수가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공연을 하면 미친 듯이 키보드 워리어가 되어 밤새도록 찾아 헤맨다(공짜표를). 이 에너제틱한 괴력은 숨겨지지가 않는다. 일에서도 엉뚱하게 나타난다. 감독과 함께하라는 시나리오 작업은 하지 않고 둘이서 매일매일 캐릭터 연구랍시고 <1박2일>과 <패밀리가 떴다> 버라이어티를 모아 보고는 소리를 지른다. 캐릭터 연구랍시고 술을 마시며 깊고 깊은 토론을 한다(강유미와 안영미에 대해).
이쯤 되면 광기로 점철된 길티플레저인가? 약간 숨기고 싶은 악취미를 쓰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별로 악취미가 아니잖아. 그럼 사람 사진엔 무조건 수염을 그리고 안경으로 마무리하는 진짜 은밀한 내 낙서 버릇을 써야 하나? 아니면 괴음료 ‘솔의 눈’에 탐닉했던 괴음료 헌터 시절을 써야 하나? 망설이던 끝에 그냥 지금, 아니, 내가 미쳐 있는 것을 쓰고야 말았다. 늘 조증이란 욕도 먹었는데 뭔들 못 쓰랴! 울증 없이 조증만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폭주하듯 좋아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무지 슬퍼하고 화낼 시간이 없다. 그러는 순간 환상은 깨지고 현실이 팍팍해진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김정영 프로듀서. 누나팬닷컴(가제)(오퍼스 픽쳐스)을 준비 중이다.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