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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신파도 아닌, 잔혹사도 아닌

섣부른 정치적 정당화나 연민에의 호소에 빠지지 않은 <할매꽃>

1.“나의 외가 어른들은 좌익 계열이었다”고 손자뻘 되는 감독은 담담하게 말한다. 이런 식의 영화에는 두 가지 함정이 도사리게 마련이다. 한편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민주주의에 관한 어설픈 사회적 성취를 암암리에 누리려 드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봉쇄하는 것이 더 나을 무섭고 아픈 기억을 무차별적으로 노출하여 막연한 휴머니즘이나 예각화된 정치선전의 재료로 삼는 유혹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할매꽃>은 제3의 길을 선택했다. 아마 이 점이 이 영화의 성공요인일 것이다. 인권 담론에로의 보편화 이전에 자기 피붙이들이 직접 겪었던 ‘생지옥’에 접근할 것. 사실 담론화란 개인의 기억을 가로지르는 빗장들이 어느 정도는 풀려나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섣부른 정치적 정당화나 연민에의 호소에 빠지지 않을 것.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의 문제틀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한에서 과거를 회상할 것이 <할매꽃>이 견지한 원칙이다.

슬픔이 이끌어낸 진짜 정치

2. 양반 계급의 사회주의와 상민 계급의 자본주의라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감독의 외가가 있던 상대마을과 중대마을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반면 과거에는 상민 계급이 주로 살았으며 하대마을로 불렸던 지금의 풍동마을은 ‘신 앞에 평등’을 설교하며 100년 전에 들어온 교회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에 동조했다. 이들간의 학살과 갈등은 한국전쟁 시기에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극에 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두 지역의 노인들은 잘 섞이지 않는다. 신분과 이념 사이의 이러한 전도된 관계가 영화 서두에 소개될 때 우리는 ‘외가’의 좌익 활동에 대한 가치 판단을 무의식적으로 유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감독의 정치적 중립성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섣부른 일 같다. 혹은 한국 좌파운동의 역사가 지식인 계몽운동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은 영화의 논의의 범위를 넘어선다. 오히려 영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제 네 외가 이야기를 한번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는 의사결정을 내린 것은 감독의 어머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가 이 영화의 진정한 기획자라면 주연은 누가 보아도 그녀의 어머니, 감독의 외할머니다. 외할머니는 한마디로 ‘슬퍼하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할매꽃>은 한국 현대사에서 ‘슬픔의 정치’가 구현되는 예를 당신을 주인공 삼아 보여주는 영화다. 슬픔은 우리를 사유로, 진짜 정치로 이끄는 법이다. 외할머니는 단순히 외할아버지들의 정치활동을 뒷바라지하거나 만류했던 ‘아내’, ‘여동생’, ‘누나’가 아니었으며 당신이야말로 진짜 정치활동의 중핵이었다는 게 영화의 시각이다. 만약 이 영화가 드러내는 대립이 있다면 그것은 애도를 금지하는 정치와 오히려 애도를 통해 개인을 피와 살이 한데 엉킨 거대한 몸으로 만드는 정치 사이에서 성립한다. 한편에는 슬픔 자체를 금지하는 국가보안법과 연좌제, 레드 콤플렉스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슬픔이 순환하고 발산하는 ‘좌익가족’ 성원들이 있다. 세 마을의 계급 위치와 이념이 전도된 것이 공적 영역 안에서의 일이라면 이 영화가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공과 사를 나누는 일이다. 정치활동과 벌거벗은 생명을 별개로 간주한다든지 빨치산 활동을 하던 외할아버지와 이를 만류하던 외할머니를 대립시켜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감독의 어머니가 감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이 말은 전혀 모호하지 않다. “너는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려고 하지만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살다보니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은 없는 것 같아. 사람에게는 모순이라는 것이 있잖아.” 그녀는 참과 거짓의 논리학, 슬픔을 금지하는 그 지성적인 ‘법’ 자체가 ‘거짓’임을 날카롭게 판정하는 셈이다.

3. 송충이는 모두 같다. 외국인들의 얼굴은 다 비슷해 보인다. 내포와 외연의 반비례법칙. 내포가 감소할수록 외연은 복제되어 증식한다. 우리가 무언가의 내용에 대해 잘 알지 못할수록 그 무언가와 똑같은 신체들이 새로 만들어진다. 나아가 시간이 갈수록 그 동형의 것들은 널리 퍼져나간다. 인민위원장을 지내던 큰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의 지인이었던 경찰과 함께 자수하러 가던 도중 그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그가 ‘좌익’으로 낙인 찍히는 순간 ‘좌익’은 작은외할아버지들로 복제되고, 복제된 것은 어떤 경계를 넘어 흩어진다. 한분(외조부의 동생)은 자해를 일삼고 30년간 찬송가와 성경이 적힌 일기를 쓰며 매일 새벽 교회 종을 치는 광인이 된다. 다른 한분(외조모의 동생)은 자신의 딸을 북송시키고 연락을 끊은 비정한 조총련 간부가 되며, 남한의 가족을 방문했다가 전향자로 누명을 쓰고 조총련에서 쫓겨난 뒤 쓸쓸히 돌아가신다. 사람들에 속한 무한한 내포가 ‘좌익’이라는 한 단어로 봉쇄되었을 때 그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 된다. 그들이 그렇게 정신의 선과 국경의 선을 넘는 반면에 외할머니가 이 영화의 주인공 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봉쇄를 견디며 주위의 모든 이를 가슴에 묻었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온 남편이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자신을 학대하고 집안의 희망이 보이지 않자 외할머니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우물에 비친 반영이 자신이 아닌 9남매였다는 이야기는 그녀 안의 아우성치는 ‘타자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일화다.

현실의 한계를 투명하게 반영하다

4. 기묘한 질문을 하나 해보자. 이 나라의 출발은 한국전쟁이라는 ‘빅뱅’의 순간인가 아니면 바로 이 순간인가? 곰곰이 따져보면 과거는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기억, 이를테면 ‘지금’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이다. 사실 과거란 없다. 우리가 과거라고 여기는 것은 ‘현재’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기억들이다. 그렇다면 항상 과거가 문제될 때 그 궁극적 원인은 시초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에 있지 않을까. <할매꽃>의 암흑으로 처리한 마지막 신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큰외할아버지를 총살한 경찰이 어머니 고향 친구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인터뷰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정작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딸(이모)이나 어머니의 고향 친구(경찰의 딸)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머니는 그 친구, 즉 가해자의 딸을 만나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까? 사실 그것은 외할머니가 평생을 참아왔지만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를 해보아야 친구 관계에 악영향만 남지 않을까? “말해야 한다.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말해봐야 잃을 것밖에 없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 말과 관련된 이러한 모호한 악순환만큼이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성격을 정확히 측정해주는 바로미터가 있을까?

그 어머니 친구의 아버지도 끝내는 자살했다고 한다. “사실 그분도 피해자잖아”라고 이모들은 말한다. 그 친구 분이 사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어머니가 오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일종의 극한지점. 현실은 ‘아직’ 거기까지다. 만약 두분이 아무런 앙금없이 함께 부둥켜안고 울 수만 있다면 <할매꽃>은 애초에 이렇게 비장하게 과거를 회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정치권에서 툭하면 ‘색깔 논쟁’이 불거져 나오는 현재의 무능력이 만들어놓은 회상의 한계다. 반대로 <할매꽃>이 신파와 잔혹사로 빠지지 않고 이만큼이라도 담담하고 투명하게 서술할 수 있게 된 비결은 어머니가 친구 분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까지 도달한 거리만큼 현재가 이루어낸 성취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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