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기 힘든 강을 건넌 것일까. 영상산업정책연구소 계약직 직원들에 대한 해고통지로 사쪽과 노조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영화진흥위원회가 결국 법정공방에 이르게 됐다. 지난 3월31일 영화진흥위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계약직 재임용 심의를 위한 인사위원회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진위 노조의 한인철 지부장과 윤하 사무국장 등 노조 간부들을 3월24일 폭력행위(집단 흉기 협박), 업무방해, 손괴,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동대문경찰서에 고소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3월19일 열린 인사위원회에서 위원회의 심의없이 계약직원들의 해고를 승인하려 한 김병재 사무국장과 이를 막으려던 노조원들의 다툼에서 빚어진 것이다(<씨네21> 695호 포커스 ‘영진위 내부, 다시 폭풍 속으로’ 참조). 이번 고소로 당분간 영진위 노조와 사쪽 사이에 원만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조짐이다.
노조도 반박자료 내고 맞대응
영진위 사쪽은 고소사유에 대해 “노조간부들이 폭언을 시작으로 철제 마이크, 의사봉과 받침대를 휘둘렀으며 인사위 위원장(김병재 사무국장)에게 철제 마이크를 들이대고 심한 욕설과 함께 생명을 위협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20여명의 노조원들이 회의장 밖에서 ‘인사위를 장악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인사위를 위력으로 방해했다”며 “김병재 사무국장은 물론 원천식, 김도선, 이광진 등 인사위 위원들도 겁에 질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국민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해야 할 준정부기관에서 폭력으로 공무집행을 방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국민과 영화인들을 실망시키는 폭력을 묵과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노조도 같은 날 반박자료를 발송해 맞대응했다. “‘인사위를 장악하자’란 구호는 사쪽의 일방적인 창작물이다. 또한 인사위원회는 노조 간부 2인만 참석을 하지 않아도 성립되지 않는 회의였다. 만약 애초부터 인사위 진행을 방해할 목적이었다면 번거롭게 피케팅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노조는 재계약 대상자들을 보호하는 의견을 피력하고 근무 성적 평정이 반영된, 제대로 된 인사위원회 운용을 담보해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이 밖에도 노조는 “철제 쇠마이크와 의사봉, 받침대를 마구 휘둘렀다”는 사쪽의 주장에 대해 “김병재 사무국장이 일방적으로 계약직 직원 전원해고를 결정해 의사봉으로 의결 확정을 하려고 해, 의사봉을 옆으로 밀쳐냈을 뿐”이라며 “사쪽이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 과장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이날 회의에 대해 이미 강한섭 위원장도 김병재 사무국장이 명확하게 잘못한 것”이라고 말했고, “지난 3월27일, 영화산업노조가 노사 양쪽을 만나 상호간의 외부 보도자료 배포 자제에 합의했었지만, 사쪽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덧붙였다. 영진위 노조의 윤하 사무국장은 “지부장과 사무국장 외에 황동미 정책연구부장까지 고발한 것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황동미 부장은 노조 사무국 밑에 있는 10개 부서 중 한팀의 부장일 뿐이다. 임원도 아니고 상임도 아니고, 인사위원회 당일 피켓을 들고 있었을 뿐이다. 고발을 하려면 그날 있었던 노조원들을 다 하든지 노조 임원만을 해야 하는데, 왜 황동미 부장까지 고발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기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찍어다 한데 엮어서 고발한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유인촌 장관의 직접 대화에 촉각
일단 영진위는 4월2일, 고소 당사자들을 제외한 노사 양쪽의 실무자들이 모여 협의를 할 예정이다. 그러나 사실상 영진위 사쪽의 이번 고소로 노사 갈등은 전면전 양상을 띠게 됐다. 또한 사건은 이미 영진위 내부뿐만 아니라 영화계 전체의 사안으로 확대됐다. 영화인회의와 영화제작가협회 등 7개 영화 관련 단체는 지난 3월30일, 성명을 내고 “우리 영화인들은 4기 영진위와 강한섭 위원장이 대화를 통해 사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하며 “강한섭 위원장과 4기 영진위의 행보와 그 정책들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 대안제시에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강한섭 위원장과 관련한 여러 논란에도 비판을 자제해왔던 영화계 단체들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이다. 영화인들은 성명서에서 “여러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영진위의 공적 역할을 기대했지만, 최근 일련의 사태는 영진위가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공적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일각에서 터져나온 강 위원장의 조기 퇴진설은 더욱 힘을 받는 중이다. 영진위의 갈등이 영화계 전체 대 강한섭 위원장의 구도로 번질 경우, 문화체육관광부로서도 달갑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영진위의 한 내부 관계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 강한섭 위원장의 홍콩필름마트 출장을 승인하지 않은 것도, 강 위원장를 탐탁지 않게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예측했다. 뿐만 아니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2월, 강한섭 위원장이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한 사이 독립영화인들과 간담회를 가졌던 것에 이어 지난 3월27일부터 30일까지 영화제작사와 배급사 대표, 영화배우, 극장 대표들과 직접 대화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분석되고 있다.
특히 지난 3월27일에 있었던 영화제작자와의 간담회에서 차승재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은 “영진위를 중심으로 영화산업의 활성화를 도모해도 모자랄 판에 영진위가 식물화되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이춘연 씨네2000 대표는 “(강 위원장이) 사람을 내 편 네 편 가르고, 생각이 다른데 왜 만나느냐는 식으로 나오니까 될 일이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유인촌 장관은 “(영진위와 현장 사이에)의사 소통이 잘 안되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제작 현장이 돌아갈 수 있는지 들어보려고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인촌 장관의 행보와 강한섭 위원장의 조기퇴진설을 연관짓는 관측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서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 것이지, 다른 사안과는 관련이 없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유인촌 장관의 한 측근은 “강한섭 위원장에 대한 유인촌 장관의 불신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장관이 감은 잡고 있다. 다만 영진위는 영비법(영화 및 비디오의 진흥에 관한 법률)상에 독립성을 정해놨기 때문에 정말 큰 하자가 없는 게 아니라면, 장관이 마음대로 위원장을 퇴진시킬 수 없다. 또한 이번 정부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임명한 사람 중 한명인데, 조기해임시키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저런 딜레마 때문에 장관도 고심 중인 것 같다.”
폭풍 뒤 10일만에 더 거센 폭풍
현 시점에서 영진위를 바라보는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식입장은 “양쪽이 대화를 통해 화해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진위 사쪽은 “폭력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입장이며, 노조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겠지만, 고소를 취하받기 위해 기존에 노조가 요구한 사항을 놓고 협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철제 마이크를 휘둘렀는가, 밀쳐서 떨어뜨린 건가가 아니라 영진위의 기본 업무인 영화진흥사업의 정상화다.
영진위는 지난 3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거의 하루에 한개씩의 보도자료를 내놓고 있다. 영화발전기금을 운용해 6.96%라는 수익률을 달성했다는 것, 학생 및 저예산영화 후반작업 지원사업을 한다는 것, 그외에도 보호관찰 청소년 영상치유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업무협약 체결, 필름사운드 마스터링 세미나 개최 등등이다. 지금 상황으로는 영진위가 마련한 정책과 사업 모두 영화인들에게는 관심 밖의 사안인 듯 보인다. 게다가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영진위 내부뿐만 아니라 영화계, 문화체육관광부의 불신임이 재신임으로 역전되는 일은 당분간 어려울 듯 보인다. 인사위원회가 파행으로 끝난 지 약 열흘 만에, 영진위는 더 거센 폭풍 속으로 들어갔다.
영진위 사무국장의 <씨네21> 탓
“영진위 노조간부들이… (중략) … C영화전문지 취재진을 불러 사진을 찍게 하는 등 미리 짜고 의도적으로 인사위를 열지 못하게 했다.”
영진위가 3월31일에 돌린 보도자료의 일부다. 여기서 C영화전문지가 <씨네21>이다. <씨네21>은 영진위 관련 다른 취재를 하던 과정에서 영진위와 노동조합이 갈등을 빚고 있고, 해당 사안 처리를 위해 3월19일 오후에 인사위원회가 열린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영진위가 영진위 노조와 갈등을 빚은 일이 처음이 아닌데다, 강한섭 영진위 위원장과 김병재 사무국장을 둘러싼 영화계 안팎의 부정적인 여론을 감안할 때, 취재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진위는 아무런 근거 없이 <씨네21>이 사전에 영진위 노조의 요청을 받아 취재에 나선 것이라고 왜곡한 셈이다. <씨네21>은 보도자료를 확인한 뒤 여러 경로를 통해 영진위의 해명을 요구했으나, “보도자료를 누가 썼는지 모르겠다”거나 여러 관계자들에게 “내가 쓴 게 아니다”라는 답변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병재 사무국장에게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씨네21>의 3월19일 영진위 취재가 의도적인 인사위원회 방해 목적으로 이뤄졌으며 동시에 인사위원회 진행에 방해가 됐음을 영진위가 이른 시일 내에 증명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