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극의 볼모가 된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 인질범들을 오히려 고맙게 여기고 심지어 온정을 느끼거나 지지하게 되는 현상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한다. 극도의 공포와 스트레스를 견뎌내려는 심리 왜곡 현상으로, 너무 끔찍해서 이성적 판단력을 스스로 마비시켜버리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교육에 관한 한 이 신드롬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대다수의 학부모는 경쟁교육 체제에 순응하면서 심지어 제 자식들을 적극적으로 내맡기면서 살아남(아 있는 척하)고자 몸부림친다. 외벌이 가정 전업주부로 도우미 한번 못 부르면서 서너살 아이에게 각종 학습지와 방문교육을 시키거나 둘째 애 안고 업느라 만성 어깨·척추 결림에 시달리면서 첫째 애를 위해 집안 곳곳에 한글과 영어를 써 붙여놓는 엄마들의 남다른(아니 남 같은) 교육열이 두렵다. 그들의 행동에는 이제 막 배움에 눈뜨는 아이를 돕는 즐거움에 앞서, 공포심이 어른거린다. 중학교 3학년생이 “50년은 더 산 것 같다”는 글을 남기고 자살할 정도면, 그 부모는 어땠을까. 아이의 고통을 보는 눈을 가릴 정도로 공포가 컸던 게 아닐까.
내 아이의 등수가 내 아이의 미래의 행복인 양 믿게 만드는 이 말도 안되는 서열교육은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아이가 나중에 먹고살 길이 없을까봐? 맞다. 하지만 적어도 아프지만 않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 배울 만큼 배운 부모들이 왜 의료 공공성을 갖추는 데 열 올리는 대신 사교육에 열을 올리나? 더 쉽고 빠른 혜택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등수가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아이가 로비 접대를 받는 청와대 행정관이 될지언정 로비 접대를 하는 업체 관계자가 되지 않기를, 아니 최소한 로비 접대에 사용되는 업소 종업원은 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경찰 총수가 “나도 접대를 해봤는데, 재수없으면 걸린다” 운운하는 꼴을 보면서, 권력에 가까이 가면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말을 해도 용서받는 이 비리 카르텔은 이성이 마비된 심리 왜곡 현상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거꾸로 인질범이 인질에게 동화되어 공격성이 완화되는 현상은 ‘리마 증후군’이라고 한다. 1997년 페루 리마에서 반정부 요원들이 인질들에게 신상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보인 데서 이름 붙었다. 최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인질들’의 비명을 듣자니, 불현듯 우리 사회 권력자들과 교육 책임자들이 인질범보다 더 끔찍한 자기 파괴의 상태에 놓여 있지 않은가 하는 공포심이 밀려든다.